스티븐 핑커의 저서 『빈 서판(Blank Slate)』을 읽고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중세 라틴어로 ‘깨끗이 닦아낸 서판(scraped tablet)’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마음이 가령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고 아무 개념도 담겨 있지 않은 흰 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어떻게 채워지는가? …(중략)… 이에 대한 내 대답은 한마디로, ‘경험으로부터’라는 것이다.
-존 로크
‘깨끗이 닦아낸 서판’, 즉 ‘빈 서판’은 이후 수 세기 동안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마음은 곧 비어있는 서판이기에,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새겨 넣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론은 사회과학과 인문 등 다양한 분야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정말 인간의 마음과 본성은 흰 종이일까. 여기에 『빈 서판(Blank Slate)』의 저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인간의 본성은 흰 종이가 아니다,’는 말을 던진다.
나는 서판이 비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해 왔고, 이제는 문화를 제자리로 되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Blank Slate)』 中
우리는 서판이 비어 있지 않다는, 다른 말로는 본성이 정해져 있다는 말을 두려워한다. 이는 불평등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인간의 본성이란 것이 존재하면 선천적 차이가 가능해진다)과 결정론에 대한 두려움(=우리가 자신의 선택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근심), 그리고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우리의 삶이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을까)에 기인하는 것이라 책에서 저자는 설명한다. 그리고 분명히 저자는 인간의 본성은 비어있지 않으며, 복잡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을 보통 ‘생각하는 동물’, 혹은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라 정의하곤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 너무나도 친숙한 표현이다. 하지만 혹여나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인간이 가진 이기적인 본성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떠할까. 그렇다면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일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상상을 해보자.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기 시작한 것은,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선사시대로 올라간다. 그 시대의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야생동물을 사냥하거나 채집으로 식량을 구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가족 단위로 동굴에 살아가던 시대에는, 사냥에 나서는 남성은 자신 혼자뿐이다. 그리고 날카로운 돌을 들고 사냥을 하던 중에 혹여나 맹수를 만나게 되면 죽을 것이다.(인간은 야생에서는 약체의 존재이다. 도망갈 수 있는 빠른 발이나 강한 발톱이 있지 않고, 그렇다고 날카로운 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엄청난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자기보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취해왔으며 지속적으로 대형 포식자에게 사냥을 당해왔다.”
- 유발 하라리『사피엔스』 中
하지만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사냥을 나선다면 본인이 맹수의 사냥감이 될 확률은 반으로 줄어든다.(동물은 필요 이상의 사냥을 하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3명으로 늘어나면 본인이 살 확률은 더욱 늘어난다. 열 명이 무리를 짓고 다닌다면, 자신이 맹수의 사냥감이 될 확률은 10%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무리를 이룬다면, 사냥에서 살아서 돌아갈 확률이 더욱 높아지지 않는가. 또한, 무리를 지어 사냥을 나선다면 거대한 사냥감을 잡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는 혼자서 작은 동물을 잡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이 생길 수도 있다. 이처럼 인간은 다른 누군가를 본인이 살기 위해 확률을 높여주는 수단으로, 혹은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커지는 수단으로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이기심이 곧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게 만든 이유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사회는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행동양식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인간은 처음에는 이리저리 흩어져 살았고, 나라들은 없었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면에서 짐승들보다 약해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중략)… 함께 모여 나라를 세워서 구원을 도모했답니다.
- 플라톤의 『프로타코라스』 中
인간은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본인이 하고 싶은 것만을 행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이기심을 그대로 발현하며 살아가다 보니 다른 인간들과 싸움이 일어난다. 그렇기에 이제는 혼자 살아가는 기술(사냥과 수렵 기술)에서 나아가 함께 모여 사는 기술이 필요해진다.
그렇게 해서 함께 모였을 때, 인간은 시민적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서로에게 부정의하게 처신했고, 결국 다시 흩어져서는 죽임을 당했지요. 그래서 제우스는, 우리 종족 전체가 멸종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헤르메스를 보내서 인간에게 염치와 정의를 가져다주게 하지요.
- 플라톤의 『프로타코라스』 中
시민적 기술, 즉 함께 모여 사는 기술을 『프로타고라스』에서는 ‘염치’와 ‘정의’라 말한다. ‘염치’와 ‘정의’는 함께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공리성으로 치환이 가능할 것 같다.(염치와 정의는 곧 자신의 이익만을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며, 이는 곧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방안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공리성은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발현된다.(법으로 대표되는 단어에는 규칙, 규약, 관습 등이 포함된다.)
염치와 정의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자들은 나라의 질병으로 간주하여 사형에 처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법으로 세우시오.
- 플라톤의 『프로타코라스』 中
법의 원리는 간단하다. ‘내가 당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즉, 자신이 이기심을 발현하여 남에게 주었던 피해가 본인이 대상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결국 법은 자신의 이기심을 관철시켰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자신이 다수에 의한 이기적 행동의 목표가 될 가능성이 크기에, 이를 금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다는 계산에서 시작되어 이루어진 합의의 산물이다.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 논할 때, 흔히들 악과 선, 그리고 두 분류 모두에 포함되지 않는 제3의 구역으로 분류한다. 성선설과 성악설, 성무선악설이다. 혹은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인간에게는 본성이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역사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 복잡한 무엇인가는 정말 악과 선 두 가지의 분류 중 하나인 것일까.
먼저 악(惡)에 대해 생각해보자. 악을 무엇이라 규정할까 궁금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유일한 선은 앎이요, 유일한 악은 무지이다.”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무지가 악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모를 수도 있지 않은가.(물론 소크라테스가 단순한 무지를 악이라 규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악의 기준은 무엇일까. 악하다고 규정되는 것들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변화되어왔다. 그렇기에 나는 ‘악’은 만들어진 개념이라 생각한다. 모두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과 말, 바로 이것이 ‘악’인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는 악에는 ‘절대악’이라는 것도 없다. 예를 들어보자. 인류 최악의 사건에 포함되는 ‘홀로코스트’, 하지만 이보다 수세기 전 유럽인들은 신대륙이라 불리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많은 원주민들을 학살하였고, 이는 당시에 어떠한 비난을 받지 않고 필요한 행위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개념인 악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악이 인간의 본성이라 하면, 인간의 본성 역시 만들어진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은 어떠할까. 우선, 자신의 이익을 배제하고 행하는 행동이나 말이 선의 전제가 된다면 선이라는 것은 없다. 그 이유는 타인을 돕는 행위에서 얻는 단순히 행복한 감정이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정서적 만족과 같은 이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만약 선이라는 기준에 이익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면 인간이 선을 행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존재하더라도 선은 이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선은 궁극적인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고민의 순간에 로크가 말한 "흰 종이라고 가정해보자".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흰 종이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흰 종이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흰 종이는 흰색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흰 종이는 흰색이다. 흰색이 흰 종이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선과 악 모두가 본성이 아니라면 인간에게 흰색은 무엇일까. 인간에게 흰색, 즉 본성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 이기심이 아닐까?
로크가 말한 '빈 서판'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인간에게 본성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인간이 본능적이고 본성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이나 문학과 예술의 기준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과정으로 나타났다. 책에서는 이를 비판한다. 스티븐 핑커는 인류의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특질이 반영되어야 한다 얘기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엘리트 예술과 인문학을 어떻게 공격해 왔는가를 알게 되면, 두 운동이 쇠퇴하고 몰락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해진다. 우선 두 운동은 인간 심리에 대한 잘못된 이론, 즉 빈 서판을 기초로 하고 있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Blank Slate)』 中
지금까지 책 『빈 서판』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비어있는 서판이 아님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에 더 나아가 나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심이라는 괴변적인 주장을 제기했다. 이러한 주장에 방점을 찍고 싶은 것은 '이기심'은 가치중립적이다는 점이다. '이기심'은 단어 그대로 이익을 좇는 마음으로 해석했다. 이익은 타인을 이용하여 얻는 이익도 있고, 타인에게 베풀어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있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통해 이익을 얻는 인간 본성을 갖기를 바랄 뿐이다.
끝으로, 본성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을 하나 찾았다. 바로 프랑스 소설가가 쓴 한 문장이다.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
- 미셸 투르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