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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뚠구름잡는얘기 May 12. 2021

사피엔스의 생각노트

댄 브라운의 소설 '오리진'을 읽고

<신에 대한 찬사, 과학>



"그때 저는 삶의 목적을 발견했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과학 진실을 이용해 종교 신화를 무너뜨리겠다고 말입니다."

                                                                                         (댄 브라운, 『오리진1』 문학동네, 83p)



소설 오리진을 이끌어나가는 주요한 프레임  하나는 바로 <종교vs과학> 아닐까. 창조론과 진화론, 해부학에 대한 탄압과 코페르니쿠스의 종교재판. 역사 속에서 종교와 과학은 갈등을 지속해왔고, 오늘날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정말 종교와 과학은 경쟁의 관계에만 놓여 있었던 것일까? 21세기 오늘을 얘기하기에 앞서서 17세기 영국을 잠깐 들렀다 가보자. 신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시대가 있었다. 과학혁명의 시대라고 불리었던 시대. 중심에는 영국의 왕립학회가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 안톤 판 레이우엔훅(Anton van Leeuwenhoek)의 편지 한 통은 왕립학회의 많은 과학자들을 흥분시켰다. 현미경을 통해 본 세계는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새로운 곳이었다. 웅덩이에서 퍼낸 물속에서 보이는 생명체들, 정자의 발견 등은 보이지 않는 곳에도 많은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간의 위대한 발견. 그렇지만 이것은 신에 대한 동경으로 귀결되었다. 뉴턴은 “만약 인간과 동물이 원자들의 우연한 조합으로 만들어졌다면, 많은 부분들이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 살 한 덩이가 있고 저기 손발이 너무 많이 달려 있는 식이었을 터다.”는 말로써,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신의 손길이 닿아 완벽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세계를 창조한 신이 이런 작은 세계에까지 정교하게 창조했다는 점은 감탄과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신은 가장 정교한 보석 세공사의 솜씨를 가진 장인이었다.


왕립학회의 회원이었던 뉴턴은 중력을 발견한다. 세상의 중심으로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 뉴턴은 자신의 발견에 ‘자연의 작동 방식에 대해 이제껏 알려진 것 중 가장 특이한 발견’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포물선, 자유낙하, 천체들과의 관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지금까지 몰랐던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을 알아낸 것이다. 뉴턴은 과학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보다 더 신에 가까이 다가간 인간은 없었나니.’라는 명예가 주어졌다. 뉴턴의 중력 법칙은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한, 신이 부여한 법칙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과학혁명의 시대, 그들에게는 세상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 신에 대한 부정이 아니었다. 그들은 세상을 창조한 신, 신이 부여한 질서를 발견하고 신에 대한 찬사를 표하기 위해 발견을 지속했다. 무수한 과학의 발전의 시기, 종교와 신은 그들에게 뮤즈였다.




<이상사회 테크늄>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기술력으로 인류의 자원이 무한정 풍족해져 더 이상 그것들을 둘러싸고 서로 싸울 필요가 없어지는 미래였다."

                                                                                    (댄 브라운, 『오리진2』, 문학동네, 277p)



과학과 기술의 발전,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 테크늄의 시대. 그리고 사라지는 다툼. 소설 속 주인공 ‘에드먼드 커시’가 제시하는 멀지 않은 미래의 모습은 너무나도 이상적이다. 이상적이다 못해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에드먼드 커시는 과학기술과의 융합의 대상, 그 대상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잊은 듯하다. 그리고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은 흘러온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차별을 만들어냈다. 근대사회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신분제라는 공고한 사회질서가 차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표면적인 신분제가 사라진 현대 문명사회로 접어들었다고 말은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신분의 격차가 있는 듯하다. 기득권 계층에 속한다는 사람들은 우리들을 개와 돼지로 보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타인과의 차별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이를 지속하고자 했다. 역사는 그러한 투쟁과 노력의 산물이었다. 테크늄 시대라고 이와 다를 것 같은가? 미래에도 인간은 차별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할 것은 분명하다. 남들과는 다른 우월한 지위로부터, 그들과 나는 차이나는 존재라는 점을 느낌으로서 인간이 충족하는 욕망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에드먼드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과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물음을 빼놓은 것 같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떠한 존재인가?'




<21세기 러다이트>


과학기술의 발전은 앞으로 인간이 더 이상 노동에 얽매이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인문학, 이른바 '챗봇'이라는 기능을 개발하는 우리나라의 선도적인 IT기업의 대표, 그리고 강연. 그는 '챗봇'의 기능이 많은 것을 대체할 것이라 얘기했다. AI가 우리의 많은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 기대에 찬 표정으로 강조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사라질 직업 '전화상담사'라는 설명. AI가 이제 우리의 감정노동을 대체하는 시대. 과학기술의 발달. 이는 인간에게 있어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19세기 초,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폭력적인 대중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공장의 기계를 부수었다. 그들을 행동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노동을 대체하는 기계였고, 공포였다. 자신들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될 것이라는 공포.



"증기기관 하나가 때로는 1000명의 사람을 실업자로 만들고, 모든 노동자에게 나누어질 이익을 한 사람의 수중에 넘긴다. 기계가 새롭게 개선될 때마다 숱한 가정의 빵이 강탈된다. 증기기관이 하나 만들어질 때마다 거지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페이터 리트베르헨, 김길중 역, 『유럽문화사(하)』, 지와사랑, 2003, 286p)



영국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 기계를 부수고, 노동자가 되고 싶었던 그들의 모습이 21세기 오늘날에 떠오르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언제 신을 찾는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다룬 한 영화를 보다가 등장인물의 대사가 내게  울림을 주었다.

"참호 아래 무신론자 없다"


우리는 언제 신을 찾는가. 아마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어떠한 힘이 내게 작용하여 내가 갈망하는 것을 이루게 해 주었으면,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랄 때. 그럴 때 우리는 신을 찾는다. 염원,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감정이자 단어. 죽음의 공포가 다가왔을 때 신을 찾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자신이 이룩해놓은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는다. 공포, 정말 사람들을 나약하게 만드는 감정이자 단어이다. 종교는 이 두 가지의 감정 혹은 단어를 다루며 살아간다.(나는 독실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이러한 단어 선택이 이 글을 읽는 종교인 혹은 종교를 가진 분들에게 불편함을 일으킨다면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분명히 종교가 갖는 의미와 순기능에 대해서는 반박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교는 수많은 시간을 이겨냈고, 이어져왔다. 하지만 종교가 이렇게 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종교는 인간의 감정을 치유하는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책에서 윈스턴은 얘기한다. ‘과학의 보편적 진실을 통해 사람들을 통합하고 미래 세대를 결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것이다.’ 과학이 새로운 종교가 된다. 생각해보자. 과연 과학이 종교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이 가지는 염원과 공포. 이 두 감정을, 아니면 더 많은 감정들을 과학이 과연 치유해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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