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나는 왜 내 말, 행동, 기분에 휘둘릴까요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_욕망 p.135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p.140
고야의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 43번째 작품에 등장하는 한 남자는 책상 위에 잠이 든 듯 엎드려 있다. 책상에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림의 부제다.
남자의 등 뒤로 스라소니, 부엉이, 박쥐의 모습을 한 괴물들이 깨어나 눈을 떠 날갯질하고 있다. 인간이 이성을 외면하는 순간 언제든지 괴물을 꺼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누구든 마음속에 괴물을 품고 있다. 단지 괴물을 꺼내지 않으려 이성이 노력하는 것일 뿐 누구든 언제나 다른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고야는 말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선악의 저편』에서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랫동안 심연(深淵)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본다."라는 문구가 잠언 형식으로 등장한다.
<나를 안아주는 그림 나를 치유하는 미술>(김소울, 믹스커피, 2023.10.20.)
아, 그날 이성의 끈을 놓지 말아야 했다. 바보같이 나를 약 올리며 예의 없는 따지는 P 씨의 말투에 이성을 놓고 수화기 너머에 소리를 질렀다. 안 친한데 친한 척 전화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아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아는 척하는 모습은 눌러두었던 나의 화를 깨우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나를 호구로 생각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당신 바보인가요? 당신이 쓴 문구가 무슨 말인지 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어쩌라고요? 잘 모르겠으면 생각을 하고 원칙대로 기안하세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전화기를 흡사 마이클 조던의 전성기 덩크슛처럼 내리꽂았다. 사무실에서 나의 구석진 자리까지 싸늘한 눈초리의 기운들이 따갑게 느껴졌다. 화를 내고는 상기된 얼굴로 흘러내리는 양말을 끌어올리며 사무실 슬리퍼를 갈아 신고 열받아서 씩씩거리며 '마지막 콘서트'의 가사의 소녀처럼 사무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화가 나는 경우는 직장에서 지낸 시간만큼이나 비슷하게 늘어만 갔다. 난 성격이 소심하고 무던하다고 믿으며 살았다. 그래서 화를 내는 것보다는 참는 것이 더욱 익숙한데 그만 화를 내고 말았다.
직장의 문서는 두괄식으로 명확함을 우선으로 하지만 학술지와 유사하게 졸린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어이없는 자신만의 결론으로 마무리되거나, 명탐정이나 풀어낼 암호문서로 만들어버려 추리소설 장르로 바꾸는 등 다양한 문서가 이곳에는 많았다. 그만큼 교육 없이 그저 알음알음 알아서 일하라는 문화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나의 일이 이런 소설이면 안 되는 창작 문서를 검토하고 확인하여 조직의 언어로 수정하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권한도 없는데 쓸데없이 책임감을 가졌던 나만의 성실함이 문제였다. 겸직금지의 회사에서 대놓고 사무실에서 겸직을 하며 본업을 알 수 없을 정도의 옆자리 N잡러 J 씨처럼 뭉개고 배 째고 대충대충 했어야 했을까? J 씨는 이곳이 본업이 아니라서 그런지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가끔 나의 히스테릭한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자신도 같은 부서에서 같은 일을 해야 하지만 자신은 딴 세상 사람인 것처럼 나에게 말했다.
"그래봐야 여기 사람들 뒤에서 험담이나 하지 도움 되는 거 하나도 없어."
나의 선임이던 P선배는 나에게 업무를 알려주며 항상 강조했다.
"우리 일이 평소에는 중요하지 않은데, 그래도 책임의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해."
그리고 그 선배는 사무실에서 호흡의 어려움을 호소하다가 병원에 실려가서 공황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말했다.
"회사 일 말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공부해, 그렇게 쉴틈을 만들어야 쓰러지지 않을 수 있어."
선배는 그 후 부동산 투자 공부를 하고 월급만큼의 소득을 만들겠다고 의욕을 보이며 건강히 지내고 있다.
괴물들과 싸울 때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말라고 하는 니체의 조언은 사실 말처럼 쉽지 않다. 괴물들과 어울려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괴물이 되어 버린다. 좋은 게 좋은 거고, 문제는 문제를 삼을 때까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통하는 세상에서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이성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어려서 먼저 화내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는 게임은 오늘의 직장에서도 통한다. 화를 내고 이성의 내려놓은 나의 잘못으로 나만 쓰레기고 완패다.
"나는 관대하다. 아니, 나는 관대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