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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호너구리 Sep 30. 2022

기억

죄책감

올해 서른 네살이 되었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너무나 어른스러워 보였던, 한없이 강할 줄 알았던, 그런 나이가 내게 왔다. 누군가가 나의 나이를 물을 때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한없이 스스로를 어색하게 만들었고,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러곤 불현듯, 나 자신의 살아온 과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난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슨 일들이 있었나. 34년의 삶을 사는 동안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을까. 그런 생각에 빠졌다.


어린 시절 강렬한 기억들은 좋든 싫든 평생을 따라다닌다. 그런 기억들과 경험들이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만들어 놓는다. 트라우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처음으로 화이트데이 선물을 주었던 기억, 30cm 자가 부러지도록 맞았던 기억, 눈이 쏟아지는 날에 처음으로 밤늦게 처음으로 친구들과 눈싸움을 했던 기억, 어린 시절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한 기억 좋았던 기억들, 나빴던 기억들, 모두가 지금의 나의 모습을 만들어준 하나의 재료라고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떠들기를 좋아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당연히 어린 시절, 상장이란 건 구경조차 못했고, 어린 그 당시에도 나는 그런 것들과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상장을 받은 적이 한번 있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이 난다. 교내 독후감 경시대회가 열렸다. 어린 내가 가장 싫어하던 일이었던 것이 바로 글짓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지만, 난 지독한 악필이다.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나의 악필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글씨와 멀어지고 글씨 쓰는 자체에 굉장한 거부감이 있었다. 당연히 그런 나에게 원고지 5장을 채우는 일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선생님의 꾸중을 듣기도 싫었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난 안 좋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어린이 서적에는 책 뒷부분에 예시용 독후감이 적혀있었다. 나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그 글귀를 베끼고 고통스러운 원고지를 처리했다. 그저 편했다. 그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내 눈앞에서 없애버렸다는 사실에 안도하였고, 개운 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후


난 그 독후감으로 상장을 받았다. 여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상장을 그때 처음 받아보았다. 나와는 너무나 멀다고 생각했던 그 상장이 내 손에 쥐어졌다. 하얀 종이 위에 굵은 글씨, 고급스럽게 둘러져있는 금색 테두리.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 발견한 보물상자처럼 그 상장은 빛이 났다. 부모님에게 상장을 보여줬다면, 당연히 새로운 장난감을 얻거나, 그보다 더 큰 부모님의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장은 결국 부모님에게 보여드리지 못했다. 내 인생의 첫 상장은 폐휴지 속으로 찢겨 들어갔다. 어린 내 고사리 손으로, 그 상장을 찢었다. 그 후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 인생 처음으로 느낀 죄책감의 기억이다. 그전까지 나에겐 죄책감이란 건 없었다. 동네 슈퍼에서 껌을 훔칠 때도 난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죄책감이란 자체가 아예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어린 시절 그 일이 있은 후에, 그렇게 큰 변화는 없었다. 그저 상장을 찢고, 없던 일로 한 것뿐, 어린 나에겐 큰 변화는 없었다.


어린 시절 잊힐 법도 한 기억이 이제야 나를 깨운다. 조금의 죄책감만 견뎌낸다면, 더 편하게 더 많은 상장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눈을 감고 모른 척한다면 편하고, 배불러진다. 늘 세상은 날 시험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마주했을 때. 어린 나의 모습을 다시 꺼내본다. 어린 나도 알고 있었던 것을 지금 내가 알면서도 하지 않도록 말이다. 어린 시절 나는 상장을 못 받았지만, 결국 그것이 큰 상장이 돼서 돌아온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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