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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호너구리 Sep 30. 2022

기다림

그래도 살아간다

우리의 삶은 언제 정해지는 걸까. 어린 시절부터 나는 꿈이라는 것이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흔한 어린이처럼 그저 축구를 좋아하니 축구선수라고 적은 것이 스스로 생각한 꿈의 마지막 조각이었나 보다, 그리곤 우리나라의 평범한 사람처럼 그저 하루하루 기다렸다.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고 하교를 기다렸다. 늘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없이 그렇게 기다렸다. 그렇게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꿈이라는 단어는 오직 밤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대부분의 내 나이 때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꿈과 진로보다는 그저 대학 타이틀에 매달려 대학에 진학했다. 그렇게 배웠으니깐. 우리는 모두 그렇게 배웠다. 일단은 대학의 간판이 가장 중요하다고. 대학 간판에 따라서 앞으로의 인생이 결정되고, 가장 중요하다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긴 기다림을 뚫고 드디어 대학에 들어갔다. 모두가 말했다. 대학을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배웠다. 그리곤 대학교에 들어가고 깨달았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꿈 없이 기다리던 사람이 대학에 들어간다고 한들, 없었던 꿈이 생기고 늘 기다리기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을 찾으러 나가진 않았다.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듯이, 시키는 대로 정해진대로, 마치 정교하게 짜인 커리큘럼 마냥 그냥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다.


마찬가지였다. 강의가 끝나길 기다리고, 시험이 끝나길 기다렸다. 성인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 그 달콤한 중독으로 애써 기다림의 통증을 마취시켰을 뿐이다. 모든 것에는 내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보험이 안 되는 무통주사처럼 자유라는 성능은 굉장했다. 무엇인가 다 이룰 것 같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라는 부질없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러고는 남들 다 가는 군대에 가서 많은 상처를 받고 돌아왔다. 더 이상 자유는 없었다. 사람 손에 길어진 야생동물처럼, 방생해야 할 시기가 왔다. 자유가 아니라, 그저 진정한 야생으로 돌아간다. 그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스스로 해 나아갈 시기가 와버린 것이다. 강했으면 좋았겠지만, 난 길가의 잡초가 아니었다. 무균실에서 자란 힘없는 난이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어떤 병 풍해를 견딜 힘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이야기했다. 사회, 학교, 가정 등 모든 곳에서 기다림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어 준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 편한 말에 기대에 살아보기도 했다. 어차피 살다 보면 다된다고, 하다 보면 다 길이 있다고. 34살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이 말에 기대는 것은 포기하였다. 달라진 건 없었고 고단한 하루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아침에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향해 달려간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하철 시간을 맞추기 위해 달려간다.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공부를, 누군가는 직장을 가기 위해, 누군가는 남의 위해서 달려갈 것이다. 가끔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다. 살을 에는 추위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있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어딜 향해 가는지, 어떤 것을 위해 달려가는지. 60억 인구가 존재한다면 60억 개의 인생이 존재할 것이다. 어느 하나 같지 않은, 그래서 더 경이롭고 놀라운.


그래서 살아보려고 한다. 고통스럽고 재미없고 기다리는 삶이지만, 광고 같은 짧은 행복이라도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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