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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호너구리 Nov 14. 2023

드라마 '신병'과 정병장

최근에 신병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신병'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많은 군인들의 모습. 혹은 저 중에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사람들도 기억이 나지만 가장 기억이 많이 남는 건 정병장이다.


 나보다 한 달 정도 먼저 들어온 선임이었고 마침 풀린 군번이라 내가 상병이 된 순간 정병장은 이미 중대 왕선임이 되어있었다. 내가 나왔던 부대에서는 후임을 갈군다는 단어를 '깨스'라고 표현했다. 분대장을 달고 체제유지와 군기라는 명목하에 마구마구 깨스를 뿌리고 다녔다. 그에 비해 선임이 없어진 정병장은 그저 방관하기만 하였고, 흔히 말하는 꺠쓰도 뿌리지 않았다.


정병장을 제외한 나머지 분대장들은, 이런 정병장을 굉장히 못마땅해했다. 흔히 말하는 위아래가 없어지고, 군기가 엉망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정병장에게 불만이 컸지만, 어쩌겠는가 짬밥이 최고이거늘, 그래도 시간은 지나가기에, 정병장이 전역을 하게 되었다. 반말과 훈훈한 말들이 오고 가고 마지막으로 정병장이 이야기를 했다.


'야호너구리랑 나랑은 너무 큰 괴롭힘을 당해서 더 이상 나는 누군가를 혼내거나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단지 그뿐이다.'


정병장도 우리의 불만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 어떠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마지막날 이야기 해준 것이다. 정병장은 사실 나와 힘든 이등병시절을 같이 보냈다. 맞선임들은 죄다 상병이었고 일병들이 봐도 엉망인 이등병들이 상병들 눈에는 더욱 엉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정병장과 나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폭언과 구타에 시달리고 늘 괴롭힘을 당하며 그 시절을 같이 보냈던 것이다. 


그저 나는 망각했을 뿐이다. 체제유지와 군기라는 이름하에. 당장에라도 저 선풍기에 빨랫줄을 매달려서 죽어버릴까. 경계근무를 나가서 공포탄이라도 쏴서 저 선임을 X 돼 보게 해 볼까. 2주일치 약을 한 번에 다 먹으면 실려가지 않을까. 한 시간 넘게 갈군 선임 덕분에 눈앞이 흑백이 되고 심하게 현기증으로 인해 쓰러진 적도 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며 뒤통수에 망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정병장도 나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병장은 나와 달랐다. 정병장은 약자일 때의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나는 망각했다. 나에겐 그런 시절이 없었던 것처럼. 늘 강자였던 것처럼. 지금 생각하면 정병장도 고작 23살이었는데, 참으로 성숙하고 인성이 올바른 사람이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정신 차린다 라는 말은 전부다 거짓말 아닐까. 그저 나이를 먹고 적응하고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것은 아닌가.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면서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어찌 보면 사회복지사가 된 계기 중에 하나일 거라 생각이 든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되서는 가끔 정병장을 만났었지만,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긴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저 멍하지만 푸근하게 웃는 정병장이 갑작스럽게 생각이 난다. 어떻게 지낼까. 지금도 여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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