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안인항 ~ 삼척시내
동해바다 도보여행길인 해파랑길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직장 때문에 한 달에 2-3일씩 나눠서 여행하고 있습니다. '해파랑 일기'라는 제목으로 도보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시작된 여행
겨울이 지나고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 유독 지루하고 긴 겨울이었다. 기다림이 수반된 시간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봄과 함께 새로운 시작(인사이동)이 기다리고 있어서 인지 무척이나 길고 지루했다. 긴 기다림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역시나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봄이 더 깊어져야 정리가 될 모양이다.
이번 여행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예정대로라면 다음 달 전라남도 남해안 지방으로 발령이 날 예정이어서 당분간 해파랑길 여행을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짧은 고민 끝에 배낭을 꾸려 봄맞이 여행을 결정한다. 해파랑길 여행 목적이 어느 장소에 도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여로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나를 찾아감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을 맞았고, 여정이 어느 곳이든 나는 길을 찾아 떠나기로 결정했다.
백반예찬
금요일 출근길이 즐겁다. 이른 아침 트랙킹화에 배낭차림으로 1호선 지하철에 오른다. 평일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 어울리지 않은 복장에 자격지심으로 어색한 느낌이지만, 맘은 벌써 동해의 해안길을 걷고 있다. 금요일 업무를 마치고 서울역에서 KTX로 강릉에 도착했다. 맥주 한 캔에 모텔의 꿉꿉한 느낌을 틀어막고 잠을 청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아침 식사를 할 곳을 찾아본다. 역 근처라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7시가 되지 않은 이른 시간임에도 문을 연 식당들이 많지 않아서 인지 작은 식당은 나를 마지막으로 만석이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훑어보다 백반을 주문한다.
시금치 된장국, 달걀후라이, 고등어구이, 우엉, 김치, 김과 간장, 콩나물, 마늘장아찌, 열무김치, 오뎅볶음 그리고, 공깃밥 한 공기. 흔히 볼 수 있는 반찬이다. 하지만, 요즘 이런 한상차림은 흔하지 않다. 집에서나 식당에서 메인 음식에 몇 가지 일상의 반찬으로 상차림이 간소화되었다. 서울 수도권 식당에서 백반이 메뉴판에서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는 지방의 중소도시를 방문해야 백반을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이라 선뜻 내세울 수 있는 음식은 없지만 밥 한수저에 2-3가지 반찬을 올려 입을 채우고 된장국 한 모금을 들이켜면 어느새 든든함이 가득한 아침식사가 완성된다. 특히, 달걀후라이는 없으면 못내 서운해 완성되지 않은 상차림을 맞은 듯하다. 백반은 혼자 하는 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부담없는 메뉴여서 여행을 갈 때마다 백반집을 찾곤 한다. 백반은 소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가장 정답고 우리 다운 음식 상차림이다.
정동진과 모래시계
안인항에서 정동진을 향해 걷고 있다. 아침 햇살에 홍조를 띤 갯바위를 바라보며 걷고 있다. 아름답다. 미려한 바다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오길 너무 잘했어. 힘들지만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겠어'라고 되뇌며 길을 걷는다. 아름다운 시간이다.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정동진하면 가장 생각나는 것이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일 것이다. 90년대 고현정, 최민수, 이정재를 스타로 만들었던 SBS 드라마의 한 배경이 되었던 곳이 정동진 역이다. 바닷가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작은 기차역은 이 드라마 이후 드라마의 촬영지와 더불어 해돋이 명소로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나 역시도 20대 시절 친구들과 해돋이를 보기 위해 몇 번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쉬어갈 겸 통유리를 통해 기차역이 바라보이는 카페에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앉았다. 때마침 기차가 도착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루루 역에 내린다. 40대, 50대들은 젊은 날 모래시계의 추억이 그리운지 고현정 나무 곁에서 사진을 찍고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은 아름다운 해변가의 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바다가 보이는 기차역사에서 따뜻한 봄 날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통유리를 들여다보며 커피를 마신다. 나도 통유리 안 즐거운 사람들처럼 봄날의 미소를 머금어 본다.
금진해변과 이소라
심곡항을 돌아 동해시의 금진해변에 들어선다. 한산한 금진해변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 점심은 식당을 이용하지 않을 요량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빵과 비스킷을 사뒀다. 봄 볕이 좋아서 바다멍을 즐기며 점심식사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바닷바람에 조금 춥기는 했지만 가방 속 경량 패딩을 꺼내 입고 벤치에 앉아서 점심을 먹는다. 편의점 크림빵과 다이제스티브가 모두인 조금 궁색해 보이는 점심식사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한가롭게 식사를 마친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바다를 바라보다 핸드폰 음악을 틀어본다. 무슨 음악을 들을까 잠시 고민 끝에 '이소라'를 선택한다. 끝없는 수평선, 한적한 바닷가의 벤치 그리고 비어있는 내 옆자리. 모두가 이소라의 음악과 잘 어울린다. 그녀의 목소리는 우수에 찬 쓸쓸함 그리고 외로운 사람을 향한 위로가 묻어난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 목소리를 좋아한다. 따뜻한 봄날 바다를 바라보며 한적한 벤치에서 듣기에는 '이소라'만 한 음악이 없다.
묵호에 도착해 '묵호바란'이라는 게스트하우스에 배낭을 푼다. 1박 비용이 2만원. 10인실의 도미토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렴한 숙소가 아닐 수 없다. 10인실에 고작 3명이 묵었고 2만원이라는 비용을 감안하면 하루 묵기에는 꽤 괜찮은 숙소이다. 반주를 곁들인 칼국수와 순대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겨울이 지나고 첫 여행이고 어제 30km넘게 걸어 무리를 해서인지 무릎과 발에 통증이 좀 있다. 삼척버스터미널까지는 25km. 이 날은 풍경보다는 걷는데 집중했던 것 같다. 묵호를 출발해 동해시를 거쳐 옥색바다가 인상적이었던 추암해변을 지나 어느새 삼척시내에 도착했다. 걷는데 집중해서인지 오후 2시 20분쯤 목적지인 삼척터미널에 도착했다. 예약해 둔 표를 바꾸고 늦은 점심식사를 위해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삼척 쌍용각 - 부먹과 소주
삼척 버스터미널 옆에 '삼청각'이라는 소도시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중국음식점이 있어서 들어갔다. 자장면을 한 그릇 시키고 기다리는데 동네 선후배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와서 탕수육과 짬뽕국물, 소주를 주문한다. 자장면을 먹으면서 탕수육이 내 눈에 들어온다. 손님들 취향을 묻지도 않고 소스를 부어 나온 옛날 탕수육이다. 양파와 당근, 오이 등 야채가 가득한 소스에 고기 튀김 역시 가득이다. 나름의 주도를 지키며 소주잔이 오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겹다.
나는 탕수육을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음식점에서 회식을 하면 직원들에게 탕수육말고 좀 특별한 음식을 시켜서 먹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은 탕수육이, 특히 부먹이 너무 먹고 싶은 날이 되었다. 식당에서 나와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탕수육이 먹고 싶어. 꼭 부먹이어야 해"
"웬 탕수육? 부먹?"
너무 먹고 싶어서 탕수육 한 점에 소주 한 잔 달라고 할 뻔 했다는 내 설명을 들은 아내는 귀가 시간에 맞춰서 탕수육과 소주를 준비해 줬다. 샤워를 하고 탕수육과 소주를 마시며 아내에게 여행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여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