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추억 그리고 친구들
나를 영원한 여행자로 만들어 준 잊을 수 없는 떨림. 런던 히드로 공항
1995년 12월 런던에 도착했다. 두번째 장기여행이지만 첫번째 미국여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미국여행은 현지에서 유학생활과 이민 생활 중인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 첫 도착지인 LA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먼 친구집에 가는 조금 어색하지만 편안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런던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은 조금 특별했다. 그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기다려주는 이 없는 이국땅에서의 불안함과 책과 영화를 통해서 본 유럽을 여행한다는 설레임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미지의 땅을 여행하는 불안과 설레임은 이후 내 인생 전반을 지배하는 아드레날린이 되었다. 회사와 일상에 지쳐 나를 잃어버릴 시점이 되면 귓가 멀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여행으로 이끌었던 북소리가 들려오고 런던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설레임이 혼합된 아드레날린이 잠들어 있던 진짜 나를 깨운다. 설레임이라는 아드레날린에 취한 새벽, 나는 휴가를 위한 항공기 티켓을 예약하고 그제서야 잠에 들곤 했다. 그제서야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1995년 런던의 히드로공항은 여행의 두려움과 설레임의 기억이다. 그 날의 기억은 나를 영원한 여행자로 만들어 준 잊을수 없는 떨림이다. 나는 2022년 오늘도 그 날의 두근거림으로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산다.
1996년 유레일
1995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런던에서 보내고 12월 31일 버스와 여객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늦은 밤 벨기에에 도착했다. 본격적으로 유럽본토 여행이 시작되었다. 유럽 본토여행의 시작은 유레일패스의 오픈으로 시작된다. 한 달 정기권이었기 때문에 횟수와 거리에 상관없이 한 달동안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유레일패스는 유럽을 여행하는 학생들의 필수 티켓이었다. 기간과 이동거리 대비 가성비가 워낙 좋다보니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구입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많았던 장소였다.
유레일은 당시에는 단순한 기차 이상이었다. 유레일은 여행자들의 숙소였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기도 했다. 유레일과 유레일이 출발하는 기차역은 언제나 커다란 배낭을 멘 여행자들로 붐볐고 여행자들은 서로 만나 친구가되기도 하고 연인이 되는 매파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유레일 패스로 탈 수 있는 유럽의 기차 구조는 우리나라의 기차 구조와는 많이 다르다. 긴 복도 옆에 여섯명이 앉을 수 있는 별도의 객실이 칸칸이 있는 구조이다. 현지의 승객들이 뜸해지는 밤이 되면 여행자들은 의자를 연결해 3명이 잘 수 있는 침대를 만들어 객실을 숙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가끔 국경을 지날때면 여권을 확인하기 위해 불이 켜지고 검문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젊고 곤한 상태의 여행자였던지라 이내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가끔 늦잠이라도 자게되면 다음날 복도에 늘어선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했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야간의 유레일을 애용했다. 가난한 여행자들에게 숙소비용을 아낄수 있는 야간 유레일은 다음날 저녁식사의 질을 좌우하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유레일은 여행정보의 플랫폼이었다. 인터넷은 커녕 핸드폰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여행 정보는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그나마 존재하는 여행가이드북을 기본으로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의 여행정보, 기차역이나 여행 Information Center, 그리고 유레일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가 정보를 얻는 창구의 전부였다. 유레일에서 오랜시간 기차를 함께 타면서 나누는 여행이야기는 이후 여행루트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유레일이 정차하는 기차역들이 정해져 있기때문에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친구들은 한 두번은 다시 만나게된다. 친구들을 만나고 나면 다음 목적지가 변하기도 하고 다음날 점심 메뉴나 숙소가 변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 달 가까이 여행을 하고 나면 기차역에서 승하차시에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친구가 10여명 이상이 될 때가 허다하게 된다. 그 때의 유레일은 이렇게 단순한 기차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다.
잊을수 없는 아름다움. 스위스 인터라켄
스위스 여행의 기억은 두 단어로 압축된다. 물가와 인터라켄. 내가 여행한 유럽국가 중 빅맥가격이 가장 비싼 나라가 스위스였다. 가난한 여행자에게 높은 물가는 치명적이다. 스위스에서는 식당에서 식사해 본 기억이 없다. 모든 식사를 게스트하우스에서 조리해 먹었다. 높은 물가때문에 궁핍한 여행을 했지만 40여일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가고 싶은 한 곳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스위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인터라켄때문이다.
독일어 Inter Laken은 영어로 Between Lake라는 의미이다. 인터라켄은 서호와 동호 두 개의 커다란 호수사이에 위치한 스위스의 작은 마을이다.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고 유럽의 대도시처럼 지저분하거나 어두운 구석은 찾을 수 없는 정갈한 소도시였다. 산책을 하다가 한 할머니 손에 이끌려 노상의 식수대에서 마신 물은 시원하고 깨끗했다. 할머니는 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에게 좋은 물이라고 많이 마시면 건강해진다고 몸짓으로 말씀하셨다. 식수대를 뒤로하고 자전거를 빌려서 호수로 나갔다. 호숫가에서 여행 중 가장 인상깊은 장면을 보게된다. 그것은 수정처럼 맑은 커다란 호수에 비친 눈 덮인 알프스의 모습이다. 겨울의 알프스는 그 자체로도 비교불가한 아름다움이지만 인터라켄의 호수에 비친 설산 알프스의 모습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자연의 고귀한 아름다움이었다. 백설의 알프스를 안은 푸른 빛이 도는, 티끌하나 보이지 않는 커다란 호수는 마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같다고 생각될만큼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말 없이 한 참동안 호수를 바라보았다. 다시 인터라켄을 여행한다면 인터라켄의 호수가 보이는 카페에서 아내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긴 시간 망중한을 즐겨보고 싶다.
여행은 가끔 혼자이고 싶다. 프랑스의 고도시 아비뇽
벨기에와 네델란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바로셀로나를 거쳐 프랑스 리용에 도착했다. 여행을 시작한지 한달정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리용에 도착해서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여행을 하게되면 한 두번은 갈등을 격게 된다고 한다. 나와 여행을 함께 떠나 K선배와 후배 찌니 그리고 나 사이에도 문제가 생겼다. 시작은 이탈리아 여행에서였다. K선배는 '꽃보다 할배'의 이순재씨처럼 직진본능이 있었고, 후배 찌니는 옷이나 예쁜 물건이 있으면 상점의 윈도우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스타일이다. 두 사람 모두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본인들만의 개성이다. 하지만, 그 개성들때문에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 언젠가부터 나는 앞서가는 K선배의 뒷통수를 쳐다보기 바쁘고 후배 찌니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리용에 도착해서 K선배와 후배 찌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 다음 여행지는 니스잖아요. 저는 니스가 아니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요.'
'어디 가고 싶은데? 같이 가자!!'
'아니, 그게 아니고 당분간 혼자 여행하고 싶어요... 형, 우리 몇 일후에 파리의 ㅇㅇ한인숙소에서 만나요.'
K 선배는 황당한 얼굴이었고, 후배 찌니는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싶어 아무 말을 못하고 K선배와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순한 편이지만 한 번 결심한 일은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다. 결국 K선배와 찌니는 예정대로 니스로 출발했고, 나는 예정에 없던 아비뇽이라는 프랑스의 오래된 도시로 출발했다.
아비뇽은 중세의 성으로 둘러쌓인 작은 도시이다. 도시 곳곳이 중세 건축물로 둘러쌓여 있어서 유럽의 과거를 고스란히 느낄수 있었다. 작은 도시이고 계절도 여행 비수기인 겨울이여서 도시에 여행객들이 다른 도시에 비해 많지 않았고 유스호스텔에도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랜만에 한적한 식당에 혼자 앉아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와인을 마셔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한가한 거리를 걷고 있는데 현지인들이 노상에 상품을 펼쳐놓고 장사를 하는 시장을 만났다. 노상시장 한 귀퉁이에서 농가에서 직접 생산한 듯한 와인들을 발견했다. 상표도 없고 코르크 마개에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레드와인이었다. 가격은 2-3불 정도였다. 처음 먹어본 와인의 맛은 시큼 했지만 달달한 맛이 나는 술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에 와인이 대중화된 2000대 중반까지 나에게 와인의 맛은 시큼하고 달달함이었다. 2000년대 중반 아내와 와인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내가 아비뇽에서 느낀 맛이 와인의 대표적인 맛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10여년 동안 나에게 와인의 맛은 시큼 달달함이었다.
그렇게 아비뇽에서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몇 일후 파리에서 K선배와 찌니를 다시 만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 만나 그 동안에 있었던 여행이야기를 쏟아내며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셨다. 요즘도 나는 가끔 혼자 떠나는 여행을 꿈꾼다. 몇 년전에는 겨우 아내의 허락을 받아, 미얀마에 열흘동안 혼자 여행을 했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매력은 간섭없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볼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심심하고 외롭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혼자만의 여행에서는 여럿이 여행할 때보다 친구가 많이 생긴다. 물론, 아비뇽에서도 그랬다.(아비뇽에서 만난 여학생과 같이 파리의 한인 숙소로 가서 K선배로부터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아비뇽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유럽여행이 더 멋진 추억으로 기억되어 지는게 아닐까 싶다.
귀국 그리고 영원한 여행자로 살다.
파리와 홍콩여행을 끝으로 40여일을 지속한 우리들의 배낭여행이 끝이 났다. 다음 해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지만, 여행을 잊지 못해 휴가때마다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녔다. 40대 초반에는 아내의 동의를 얻어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녀석과 장기여행을 시도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여전히 휴가에 매달리는 직장인 여행자로 살아가고 있다. K선배는 첫 배낭여행이었던 유럽여행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대학원을 다니며 호주를 비롯해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고 한다. 후배 찌니는 얼마 전 남편과 아이를 한국에 남기고 우리가 여행했던 서유럽을 다녀왔다며, 정말 많이 변했다고 꼭 다시 가보라 한다. 우리 셋 모두 여전히 팍팍한 한국의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1995년 겨울 자유롭게 빛나던 젊은 여행자의 모습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가슴 속의 두려움과 설레임을 잊지 못해 배낭을 메고 다시 떠날 날을 고대하며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다시 떠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