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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형 Mar 21. 2022

1995년 유럽의 기억

EP 1. 졸업을 미루고 다시  배낭을 메다.

            코로나가 발병하지 2년이 넘었다. 2020년 딸아이와 같이 중국 시안(西安)을 여행하려고 비행기 예약을 준비하고 있었던 때이다. 중국에서 막 시작한 코로나 상황을 주시하다가 중국여행을 포기했고, 동남아로 변경하려던 계획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코로나 상황이 호전되면 가야지... 조금만 참자!!'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2년이 넘게 코로나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고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2년이상 지난 지금 하루 확진자가 40~50만명에 달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올해도 여행은 불가능할 것 같고, 내년에도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여행의 즐거움은 첫째가 여행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설레임이고, 둘째가 여행 속 환희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가 기억속 여행의 그리움을 되새겨보는 것이다. 딸아이와 코로나 후의 여행을 이야기하다가 당장 여행은 어려우니 여행의 세번째 즐거움인 과거 여행의 기억의 되새겨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 1993년 30여일의 미국여행, 1995년 40여일의 유럽여행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며 중국 북경,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타이완, 중국 윈난 등지를 여행했다.


오늘은 내 두번째 배낭여행인 1995년 서유럽 여행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1995 나는 대학 4학년이었다.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년전 미국으로 한달동안 여행을 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해외여행이 자율화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처음으로 해외에 다녀와서 느낀 것은 내가 생각했던 상상이상의 것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도로, 처음보는 대형수퍼에 진열대에 쌓인 이름모를 상품들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뉴욕의 마천루와 영화에서만 보던 워싱턴의 모습, 끝없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풍경은 잊을  없었다. 올해가 지나가고 취업을 하면 다시는 이런 여행을   없다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유럽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2학기기 시작되기  휴학원을 제출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휴학원을 제출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린 것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는 간파하시고 깊은  숨을 쉬시긴 하셨지만 허락하셨다. 12월에 여행을 가기위해  년정도 과외를 하며 여행자금을 모으고 여행준비를 했다.


            가을 대학방송국 출신인 나는 학교 방송국 회의실에서 동행하기로 약속한 K선배와 여행계획을 세웠다. 여행에 들떠 어느 나라를 여행할지, 항공편은 어떻게 예약해야 하는지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일동안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여자 후배가 우리 둘에게 와서 대뜸 이렇게 말한다.


' 선배, 저도 같이 가요... 유럽!!!'

' ㅋㅋㅋ 얌마, 유럽이 뭐 교문 앞 전주집이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 엄마한테도 다 허락받았어요... 방송국 선배들과 같이가면 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 찌니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무리 방송국 선후배지만 한 달도 넘는 시간을 어떻게 남자 둘하고  다니냐?'

' 엄마에게 허락도 다 받았어요... 같이 가요. 나도 가고 싶어요.'


아무래도 4년이나 어린 여자 후배와 동행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조르는 후배를 한동안 피해다녀야 했다.  일이 지나고 방송국 회의실에 다시 모여 여행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후배 찌니가 다가온다.


' 선배, 전화왔어요. 기자실 전화받으세요...'

' 그래, 나한테?.... 여보세요?'

' 아... 안녕하세요? 저 찌니 엄마인데요.'

' 예... 누구시라구요?'

 ' 예 마산에 사는 찌니 엄마입니다. 찌니가 유럽여행을 꼭 해야겠다고 막무가내여서 전화를 한 번 드렸습니다. 방송국 선배들과 동행하면 마음이 놓일 듯해서 이렇게 전화드렸습니다. 아이가 막무가내라 불편하시더라도 부탁드립니다. ' 


K선배와 나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한참을 서로 쳐다보다가 후배 찌니를 여행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995년 겨울 대학방송국 선후배가 40일의 배낭여행에 나서게 되었다. 


1995년 배낭여행은 어떻게 준비했을까?

             

          여행의 시작은 예나 지금이나 비행기 티켓팅으로 시작된다. 당시에 비행기 예약이 기차표 끊듯이 쉽게 되던 시절이 아니었다. 2년전 93년에 미국여행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티켓팅은 배낭여행 전문 여행사에서 상담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압구정동에 배낭여행 전문여행사가 2-3곳 있었다. 나는 '블루'라는 배낭여행 전문 여행사(검색해 보니 동명의 여행사가 있는데 같은 여행사인지는 모르겠다.)에서 티켓팅과 배낭여행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인테넷이라고는 전화선을 연결해서 하이텔이나 천리안에 접속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주변에서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시절인지라 최신정보를 얻기에는 여행사만한 곳이 없었다. 경유지에서도 여행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경유지와 가격을 고려하여 몇 일을 숙고하다가 결국 주머니사정으로 인해 가장 싼 티켓 두 장중 택일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싼 티켓은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들어가는 티켓이었고, 두번째로 싼 티켓은 홍콩을 경유하여 영국 런던으로 들어가는 티켓이었다. 최종 결정한 티켓은 홍콩을 경유하여 런던으로 들어가는 케세이퍼시픽항공이었다. 가장 저렴한 모스크바 경유 항공을 선택하고 싶었으나 무서웠다. 모스크바가. 당시 러시아는 우리에게 소련이라는 국명이 더 알려진 나라였다. 연방이 해체된지 얼마 안되었고, 언론에서도 혼란한 상황이 연일 방영되고 있어서 실제로 두려웠다. 요즘 생각하면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땐 그랬다.


           티켓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여행정보를 찾고 루트를 짰다. 사실 별로 고민할 것이 없었다.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행안내서라고는 일본 여행안내서를 번역한 '세계를 간다'라는 책이 유일했다. 여행하면서 만난 한국의 여행자들과 붙인 이 책의 별명이 '세계를 헤멘다'였을 정도로 유럽의 길을 찾는데는 너무 엉성했다. 하지만, 유럽의 종합적인 정보는 여행자 대부분이 이 책에 의존했다. 지리적으로는 너무 엉망이여서 유럽에서는 서점에서 'WESTER EUROPE'이라는 영문판 안내서를 구입해 참고했다. 여행루트도 정보가 너무 없어서 큰 틀에서만 짜야했다. 12월말 런던에서 여행을 시작해서 1월초 버스로 도버해협을 지나 벨기에 브리셀에 도착, 30일짜리 유레일패스를 오픈하고 서유럽의 동쪽과 남쪽을 돌아 유레일패스가 끝나는 2월초 파리로 들어와서 여행을 하다가 출국해서 홍콩을 경유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일정을 짰다. 실제 여행에서도 어느 나라를 여행할지는 그때 그때 정하며 여행했다. 그땐 그랬다.


           여행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200~250만원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의 돈은 여행자수표와 달러를 준비했고, 아버지께서 비상용으로 신용카드를 준비해주셨다. 신용카드 처음 본 날이었다. 왕복 비행기 티켓이 40만원 초반대였고, 유레일티켓은 20~30만원정도로 기억한다. 그리고, 하루생활비는 3만원이었다. 유스호스텔 비용이  평균 1만원, 교통비와 입장료 1만원~1만5천원, 식대가 나머지였다. 식대가 모자랐기 때문에 유스호스텔에서 아침식사로 딱딱한 유럽빵과 버터, 잼이 나오면 가능한 많이 먹고, 배낭에 빵과 잼을 챙겼다. 그리고, 여행 중 공원에서 점심으로 빵을 먹은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저녁은 대부분 마트에서 음식을 사서 숙소에서 조리해 먹었다. 그래서인지 유럽여행을 하기는 했지만, 각 나라의 맛있는 음식은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친구들끼리 빵을 먹으며,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꼭 다시 여행을 와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거라는 웃픈 이야기를 남기곤 했다. 그땐 그랬다. 


우리는 그렇게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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