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잘 가~
ㅇ 나는 20대에도 울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눈물이 참 많았다. 부모님이 혼내셔도, 선생님이 조금만 꾸중을 하셔도 눈물이 났다. 남자라는 서러운 편견과 남보다 더 큰 덩치 때문이었을까 눈물을 꾹 참다가 혼자가 되면 쏟아내곤 했었다. 혼나는 것보다 내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싫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작은 감정 변화에도 울컥울컥 눈물이 났다. 부끄러웠다. 어쩌다 눈물을 흘리게 되면 남자답지 못 하다는 둥, 덩칫값 못한다는 소리가 돌아왔다.
20대가 되고 나는 혼자 영화보는 것과 책 읽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다. 어쩌면 눈치 보지 않고 눈물 흘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불 꺼진 극장 혼자 슬픈 멜로 영화를 보면 덩치 큰 남자도 손수건을 적시며 영화를 볼 수 있다. 남들 모두 잠든 깊은 저녁 소설 속 인물이 되어 눈물 짓는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눈물은 남이 알지 못하는 나만의 것이어야 했다.
ㅇ 우는 방법을 잊은 울보
직장 생활이 시작되자, 사회는 나에게 눈물 흘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내 30대와 40대는 잠에서 깨어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술 마시고 잠드는 날의 무한반복이었다. 눈물은 사치였고 술에 취해 주정과 함께 쏟아내는 배설물에 불과했다. 감성과 이성이 삭제되고 과로와 분노가 만들어 낸 것은 땀인지 물인지 이슬(참이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많던 눈물이 한순간에 모두 말라버린 것인지, 울보가 우는 방법을 잊은 것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린시절 내 아버지가 우는 것을 보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눈물을 잃어버린 나는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강요했다. <아들아, 울지 말아야 한다. 울어서 해결되는 일은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마라.> 아들녀석이 울 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다그치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를 닮아서인지 울음이 많았던 아들녀석은 점점 눈물이 없고 건조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20대 중반의 성인이 된 내 아이는 속 마음을 잘 비치지 않는 친구로 자랐다. 어느 날 아내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됐어. 남자든 여자든,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해 주었어야 하는데 정말 잘못한 일이었어.>
나이가 들면서 감정을 밖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된다. 웃고, 우는 인간의 감정 표현뿐 아니라 화내고 분노하는 감정 표출마저도 인간에게는 반드시 필요했음을 절감한다. 살아가면서 내 감정이 적절히 표출되지 않으면 속으로 쌓여 독이 될 뿐 아니라 삶 자체가 건조해져 내 인생이 마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된 양 느껴지게 된다. 어리석게도 그런 바보같은 짓을 본인에게 저지른 것도 부족하여 자식에게 강요했으니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이다.
ㅇ 멜로 드라마와 아저씨
몇 년 전 출장 중 KTX에서 책을 읽다가 감정조절이 안 돼서 눈물을 쏟은 적이 있었다. 열차 안에서 잠시 무색하긴 했지만 이유 모를 해방감과 청량감에 한동안 잠겨 있었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15년 전쯤, 집안 분위기 전환을 위해 없애버렸다. 그 뒤로 TV 드라마를 보지 않다가 최근 OTT가 활성화되고 손 안의 TV가 각자 생기면서 드라마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특히 지방 사무실에 근무했던 2년 동안 밤마다 드라마를 봤다. 좋아하는 드라마의 장르 중 하나가 멜로 드라마이다. 특히, 한국의 멜로를 보며 박장대소하기도 하고 눈물짓기도 하며 오롯하게 드라마를 즐겼다. 50대가 되면 남성호르몬이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여성호르몬이 활성화된다던데 나도 그런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호르몬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멜로 드라마로 인해 우는 방법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어린 시절처럼 눈물 흘리는 것이 마냥 부끄럽지만은 않다. 오히려 잃어버린 나를 찾은 것 같은 뿌듯함 마저 느낀다. 멜로 드라마는 나를 다시 울보로 만들었다.
토요일 오전 천주교 성당에 마련된 장례식장. 대학 1년 선배(89학번)의 상가이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동기들과 장례식장을 찾았다. 날은 흐려 지상마저 어두침침하고 성당 지하의 장례식장은 온통 흰색과 검은색의 흑백 영화같은 모습이다. 화환이 늘어서 있는 복도를 지나 장례식장에 들어선다. 상복이 어색해 보이는 아직은 어린 상주들과 미망인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식장에 들어서자 형의 모습이 보인다. 언제나처럼 밝게 웃는 모습이다. 대학시절에도 잘 생긴 얼굴에 웃는 상이었던 형은 장례식에서도 여전히 웃는 모습이다.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지고 절을 하고 상주들을 위로해야 함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슬픔과 눈물, 기쁨과 웃음은 전염되는 법이다. 나에게서 눈물이 전염된 것인지, 나도 전염되어 눈물을 흘리게 되었는지 같이 간 동기들도, 상주도, 미망인도 함께 눈물을 흘린다. 미망인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복도로 모두 나와 감정을 추스른다. 상가 식당에 마주 앉은 아저씨들은 서로의 모습이 객쩍었는지 연신 소주를 들이켠다.
어색한 침묵이 정리되고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몇몇 선후배들이 금방 우리와 같은 얼굴로 식당으로 들어와 옆자리에 앉는다. 우리는 조용히 소주를 한 잔 따라주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망자의 대학동기이자 절친이었던 S형이 유독 눈이 많이 붉게 부어서 식당으로 들어선다. 소주를 한 잔 들이켜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앉아있다. 옆자리의 친구가 술잔을 채워주며 ‘요즘은 어찌나 눈물이 많아졌는지 드라마 보고 펑펑 운다.’는 말로 어색해하는 S형을 웃음 짓게 한다. 그렇게 몇 명의 선후배들이 도착했고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물론 슬픔과 눈물은 소주로 묻어야 하는 양 소주도 계속되어 다들 술에 취하고서야 상가를 떠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할 즈음 취기 어린 몇몇 동기들이 시간차로 전화를 한다. <야… 우리 건강하게 오래 만나자. 회사 다 필요 없어. >, <어휴~~, 너무 허무하다. 이게 뭐냐.> 술에 취해 회사와 일에 얽매이지 말자고, 오랫동안 재미있게 보자는 말의 반복으로 전화는 끝났다. 헤어져 집에 가자니 분이 풀리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전화를 한 친구들도 나도 모두 다시 내일이면 회사에, 사업에 뼈를 갈아 넣을 듯 움직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었다. 학교 교육을 통해, 미디어로, 부모에게. 이 강박이 언제 해소될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멜로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는 아저씨들의 모습은 어쩌면 호르몬 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기 위한 인간의 최소 방어기제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노란 개나리 흐드러지게 핀 언덕에서
장대 휘두르며 마냥 즐거웠던 우리 20대
쓴 소주 기울이며 즐거워하던 형의 모습
여전히 웃고 있는 영정을 바라보며
우리는 또 한 잔을 들이킵니다
우리들의 한자락에 형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잘 가.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