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무섭고, 무섭고, 또 무서워서
"난 정말 도저히 모르겠어.
도대체 사랑한다는 말에 더 이상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하는지."
삶의 어느 기점들 사이로 몇 번의 연애가 지나간 후, 사랑이란 말은 날 향한 기만에 불과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무언가의 디딤돌,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방향을 가진 파도 같은 것. 그런 이유로 순도가 낮은 언어이기에 신뢰할 수 없다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게 와 닿은 그의 '사랑한다'는 말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최대한 그의 표정과, 그에 이어진 마음이 일그러지지 않을 수 있을까.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답했다.
"응, 정말 고마워"
나도 안다. 이런 상황엔 "나도"라는 말이 왔어야 한다는 걸. 그래야만 그의 황당한 얼굴을 보며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그의 친구들이 하는 험담에 귀가 가렵지 않을 수 있다는 것. 하나 그 말에는 어떤 책임이 붙는지 알기에 오히려 고맙다는 말만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더없이 신중하고 책임 있는 답이었다.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까만 정적이 흐른 그날 밤은 유난히 길었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마지막 순간이 언제였던 걸까. 분명 '사랑한다'는 말을 기억의 조각들에서 떠올려 곱씹는 것만으로도 마음 이 퍽 간질이던 때가. 그 표현이 내 감정에 비해 너무나 구태의연한 문장으로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당시의 내겐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건 하나의 권리였다.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 그걸 내뱉고 말고의 결정은 주체인 내가 쥐고 있는, 그저 선택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점점, '사랑한다'는 말을 이용하고 남용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 권리는 약해져만 갔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겠다 장담하더니 그 무엇도 주지 않았던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를 회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한다'는 말은 권력이었다. 자신의 힘을 휘두를 수 있는 마땅한 사유를 주고, 한껏 상대방을 바닥에 무릎 꿇릴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럴 가치 없는 그들에게 뱉어낸 '사랑한다'라는 말의 책임을 지기 위해 내 마음은 수백 번씩 부서지듯 쓸려나갔다. 사랑의 가치를 찾으려 고작 그 말 한마디의 끝에 머리를 조아렸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내게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 체념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했고, 그 신념이 상대방에게 있어 내가 의미 있는 사람이라 믿게 했다. 그렇게 "난 나 자신 이외의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어"라는 지나간 연인의 눈빛을 진심으로 감내하던 나날들이 지나갔다.
영화 <이름없는 새>
무던히도, '사랑한다'를 외쳤던 나는 사라졌다. 대신 이젠 내가 그들을 기만하리라고, 사랑한다는 말 앞에서 힘조차도 주지 않고 코웃음 치리라는 못난 형상이 그 빈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에게 환멸을 느껴 헤어짐을 고하고, 다가오는 이의 진심을 저울질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실은 가장 형편없는 존재는 나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기에 더욱 이미 저 반대편의 사람이 된 내게 나타난 그가 아팠다.
내 시선이 닿는 그의 위치를 조금만 바라봐도 이내 깨달을 사실이었다. '사람을 소유할 순 없다' 말하면서도 사실 그가 온전히 내 것이길 바라는 나의 모순. 그를 이미 사랑함에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고집이란 그 지옥 속에서 깨달았다.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나도 안다. 그에게 마냥 사랑한다 답하기엔, 이미 꼬일 대로 꼬인 것이 나란 사람이다. 사랑에 빠지긴 하나, 나 자신을 온전히 던져놓고 모든 화살을 감수하는 것도,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책임을 질 용기조차 없는 비겁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했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했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전제 하에'는 내가 만든 알량한 도피처에 불과하다. 내 모든 마음에 전제를 매겨 내 진심을 회피한다. '내가 널 위해 상처까지 감수할 수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음에 진실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진심들을 하나의 전제로 묶어 가벼운 농담 정도로 숨긴다. 그러니 최후의 순간, 그 어디에도 내 탓이 없을 구실을 만들어 놓는다.
내일 아침이 되면 웃으며 그를 보낼 것이다. 내게서 어정쩡 히 물러나는 그를 바라보며 휘몰아치는 감정을 애써 잠재울 것이다. 결국 전제란 조건이 성립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이니. 그렇게 나 또한 그의 무게를 버틸 것이다. 이젠 내겐 그것밖에 뾰족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