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 혐오, 그리고 차별
영국에서 마주한 오만과 편견
처음 런던에 왔을 때는 단순히 빨간 버스, 셜록홈즈와 해리포터, 영국 신사, 런던아이의 야경 등을 이유로 영국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직접 살면서 보게 된 영국은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랐다. 아니, 다르다기 보다는 무언가가 더해져 있었고 그것은 바로 '다양성'이라는 특징이었다. 다국가에서 온 다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사는 영국의 곳곳에는 다양한 문화가 녹아있었으며 그 흔적들이 바로 현재의 영국을 정의하고 있었다.
물론 다양성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교환학생 시절, 학교 주위에서 무슬림을 쫓아내자는 목적의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나, 브렉시트 투표 당시 LEAVE라는 팻말을 들고 지하철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이 경우에 속할 것이다. 그들이 주장 하는 바는 테러가 일어나는 것도,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도 나와 다른 인종, 다른 국적을 가진 누군가의 탓이었다.
오만과 편견이란 소설에서 나온 한 구절처럼, 그들의 오만은 남이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했고, 그들의 편견은 그들이 남을 사랑하지 못하게 했다.
(빅이슈 코리아 2016년 10월호, 내가 썼던 칼럼 중에서)
넌 포크 말고 젓가락이 필요하지 않니?
영국에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한국에선 느끼지 못한 종류의 차별들을 겪어야했다. 그저 자국민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것에 대한 차별도 있었지만 가장 힘들게 다가왔던 차별은 인종차별이였다. 사실 난 참 인종차별이라는 개념 자체가 웃기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신념대로 만약 조물주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서로 다양성을 인식하며 조화롭고 재밌게 살아보라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인간을 만들었는데 다들 고만고만 한것들이 서로 차별한다며 혀를 끌끌 차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내가 겪었던 인종차별들을 모두 다 기억할 정도로 힘들어 했던 것 같다. 그만큼 차별이란건 물리적인 폭력을 넘어서 사람의 마음까지도 다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남들이 규정한 카테고리에 분류되어 남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것. 한국에서 한국인으로써 살 때는 흔히 느껴보지 못한 일이었다.
교환학생의 신분으로 영국에 머무르던 시절, 한국인 친구와 둘이서 펍에 식사를 해결하러 갔던 날이였다.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할아버지 두명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니하오" 라고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우리가 조금씩 당황해하자 그들은 반응이 재밌었는지 갑자기 친구와 나의 포크를 가져가곤 " 너넨 포크가 아니라 젓가락이 필요하지 않니? 젓가락을 써! " 라고 말하며 포크를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한 우리는 종업원을 불러 이야기를 하고 새 포크와 나이프를 받고 나서야 겨우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에도 교환학생 시절을 비롯한 영국 생활에서 나는 갖가지 인종차별 표현과 이방인에 대한 혐오표현들을 들으며 지내야했다. 니하오! 곤니찌와! 라고 길거리에서 장난식으로 인사를 거는건 기본이며, 밤 늦게 혼자 돌아다니는 날이면 술집에서 취한 사람들이 너는 에일리언이니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내게 소리친 적도 많았다. 가끔 한국인 친구들과 무리라도 지어서 다니는 날이면 ‘삼성이 부도났나봐 길거리에 한국인이 많은걸 보니’ 등의 나름 유머랍시고(?) 낄낄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 이것이 그들에게 이런 행동들을 할 수 있다 생각한 유일한 이유였다. 내가 태어나면서 갖게 된 뿌리, 내가 결코 살면서 바꿀 수 없는 무언가를 기준으로 누군가에게 조롱받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였다. 인격 모독의 범위를 넘어서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인데도 그 무게를 깨닫지 못한 채 너무나도 가볍게 행동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화나기도, 그리고 내 안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에 슬프기도 했다.
일반화의 오류, 그리고 잘못된 고정관념
사실 몇번의 테러가 일어난 뒤 영국 내의 의외로 많은 이들이 특정 카테고리에 속한 집단에 대한 혐오를 뿜어냈다. 이 현상이 놀랍지 않았던 이유는 이런 차별들이 그들에겐 너무 당연하게 보였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화의 오류에서 빚어진 고정관념을 너무나도 쉽게 휘둘렀다. 피부의 색깔과 생김새로 무슬림일거라 단정지어 버리고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니 쫓아내자 등의 언행으로 이어지는 사고 과정을 너무나도 당당히 드러냈다.
역 주위에서 무슬림은 테러를 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돌리며 스피치를 하는 사람들, 광장에서 ‘저는 무슬림이지만 테러리스트가 아니에요’ 라는 피켓을 들고 자신의 눈을 가린채 프리허그 운동을 하는 남성을 보면서 이 현상들이 결코 남일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애초에 해명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명하며 있는 힘껏 싸우고 있었다.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 해봐도 이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인지 알 수 있다. 차별을 하는 이들의 이면에는 억지논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테러리스트는 옳지 않은 명분과 자신들이 믿고 있는 교리에 기반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하는 배척해야 할 범죄자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해를 가한 테러리스트는 따로 있는데 정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 죄의 무게를,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는게 이 얼마나 저열하고 무지한 행동이냐는 말이다. 너무나도 당당히 이런 행동들을 하는 일부의 영국인들을 보며, 한번씩 내가 비상식이고 그들이 상식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사실 이런 혐오의 시대를 살며 나는 어느 순간 화를 내기를 포기했던 적도 있었다.
마음 한편엔 내가 소리낸다고 해서 이런 사람들이 바뀌긴 할까 라는 생각,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서움이 있었다. 밤길을 걷는 날이나 혼자 다니는 날에 그런 일이 있었던 때에는 반박하다가 혹시나 맞거나 더 큰 피해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 전 일어났던 브라이튼 유학생 폭행 사건은 뉴스를 보면서도 내 심장이 덜컹했던 정도였다. 모욕으로 시작한 혐오 및 차별이 폭행까지 이어진 사건, 다행히 범인은 잡혔다지만 한동안 한인사회에서도 사건 동영상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사람들을 화나게, 또한 두렵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차별에 대해서 입을 열게된 건 한가지 이유였다. 나는 이것이 차별의 가장 무서운 점이라고 생각했다. 차별은 언어적이나 물리적 형태를 동반한 폭력이고, 폭력이란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에 대해 방관하는 순간 그것이 가해자에게 하나의 권리로 받아들이게끔 착각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소리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용기를 되찾은 곳은 내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었던 영국이였다. "넌 여기서 이방인이니 이런 대접을 받아도 돼" 라는 이들과 달리 "너가 여기서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널 그렇게 대하게 놔둬선 안돼" 라고 말해주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 덕분이었다.
온갖 차별과 혐오, 그 사이에서도 그와 함께 항상 사랑은 존재했다. 그제서야 나는 어쩌면 정말 큰 실수를 할 뻔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일부의 영국인들, 나를 부정하고 차별하는 이들을 보고 영국의 모든 것을 미워할 뻔 한것이다. 그것은 일반화의 오류로 인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휘두르던 무지한 이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동이였다. 아마 나 또한 똑같이 혐오로 대응했다면 차별에 대한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었을 것이며 나는 영국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Love Wins Hate
그러기에 나는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말을 믿는다. 나는 이 말이 이상적이면서도 아주 현실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혐오에는 희망이 없지만, 사랑에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든 오만과 편견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오만과 편견에 속지 않는 이들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조금씩 사랑으로 채워져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본 바로는 혐오는 절대 혐오를 이길 수 없지만, 사랑만은 혐오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