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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의 친구들을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코로나 시대를 맞이한 이의 잠깐의 푸념

by 정지은 Jean

20대 중 총 3년 반의 시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중 교환학생 기간을 제외한 2년 동안은 런던에서 일했다.

최근 코로나 사태가 심화되며 영국에서의 나날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당시의 나는 영국을 꽤 증오했던 것 같다. 애초에 런던에 도착했던 첫날부터가 난장판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은 전 세계가 주목하던 '브렉시트(Brexit)' 대국민 투표가 있기 하루 전이었고 지하철역에 내린 순간부터 'LEAVE'라는 팻말을 든 이들이 던진 따가운 시선과 인종 차별을 견뎌야 했다. 내 모습과 머리칼의 색깔, 그리고 자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치 그들이 나를 증오해야 마땅할 이유처럼 보였고, 그때의 그 눈빛은 꽤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이후 2년간 총 두 번의 부동산 사기, 하물며 룸메이트에게 강도를 당하질 않나, 집이랑 사무실 주위에서 테러가 연속적으로 일어나지 않나.

당시 페이스북에서 '나는 안전하다'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을 정도니. 유럽 내 테러가 워낙 빈번한 시기이자 한국 대사관에서 끊임없는 위험 문자가 날아오던 시국이었다.


런던의 랜드마크 중 한 곳인 '더 샤드(the shard)'의 사무실에서 일했던 나는 매일 아침 삼엄한 경호 속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며 출근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돌아와서 영화 기자로 일할 때 괴로웠던 적들이 많았다. 런던을 배경으로 한 테러 영화에서 테러범들이 '더 샤드'나 '런던 브릿지'를 붕괴시키는 CG 촬영본을 볼 때 가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곤 했기 때문이다.

인식되지 못한 트라우마였다. 매일 내가 폭탄에 터지거나, 괴한의 칼에 찔리거나, 혹은 차량으로 들이받아져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출근을 한다는 것이. 그것이 당시엔 일상이었기에 동료들은 그것에 대해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무서움을 이기기 위한 각자의 최면 요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내게 혐오를 이길 사랑의 기회를 제공해줬다. 넓은 타지에 갇혀 괴롭던 시기를 벗어나 나만의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한국의 현실과 다른 아바타처럼 살아가는 듯한 꿈만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테러범으로 규정하거나 이민자, 난민들이 지닌 피부색과 생김새로 인해 혐오하는 이들에게 "누구도 네게 그런 대접을 하도록 용인하면 안 돼"라고 대신 화내고 지지해주는 이들을 만났다.

이러한 일들이 이젠 벌써 전생의 기억같이 자리 잡은 지금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최근 상담을 통해 그날들의 이야기들을 꺼내며 결론적으로는 영국은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사는 거리를 누비며 또 다른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건 정말 흔치 않은, 미래의 자양분이 충분히 될 만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런던에서 마지막 직장을 관두고 나올 때, 평소 야근을 할 때마다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던 경호원이 작별인사를 한 순간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경호할 일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줘.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네 말을 듣고 나니 궁금해졌거든."

이 글을 쓰다 문득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미소를 떠올렸다. 꼭 코로나 시대가 빨리 종식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요즘이다. 언젠가 다시 지구 반대편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스타그램에 동시 게재된 글입니다.

@jeanbehere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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