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외국에서 살며 주워들은 미신이지만 유럽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이 지옥이고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지 못하니 일을 하는 것이 곧 죄를 씻는 행위라고 믿는다더라. 그것이 진실인지 자세히 알 길은 없으나 당최 평등하지 않으며 불합리한 일만 잔뜩 일어나지 않는 이 세상을 보니, 아마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고 불행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천국은 따로 있지 않나 싶다.
30대가 되고 나서 이전보다 더욱 세상 염세적인 태도로 살게 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 세상이 지옥이라 더욱 믿게 되는 이유는 당연히 '일'에 있는 것 같다. 10대가 보는 20대, 20대가 보는 30대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겠지만 확실한 건 30대가 되면 업무량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지옥에서 견뎌야 하는 고통의 노역이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하는 구간이란 의미다.
까라면 까고 구르고 구르던 20대에서 내 노예 생활이 청산될 줄 알았으나 30대에 갑자기 관리직에 앉게 되거나 책임감이 늘게 되면 더 이상 신입 때처럼 혼나고 넘어가고의 상황으로 무마될 수가 없다. 직접 나서서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의 상황, 바깥 문제들까지 해결해야 한다.
대부분 그런 상황은 애석하게도 끝까지 갈 대로 간 상황이고, 더욱 애석하게도 2021년에 아직 타임머신이 존재하진 않으니 어떻게 시간을 돌릴 수도 없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전략을 내세워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인데 차라리 눈물 쏙 빠질 때까지 혼나는 게 낫다. 가끔 남의 똥을 처리하면서는 그냥 누구나 하나쯤 품에 품고 사는 사직서를 날려버리고 나도 같이 똥을 싸고(???)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퇴사가 답인가. 회사를 탈출한다 해도 30대는 '나잇값'이라는 책임의 시선에서는 탈출할 수 없다. 30대는 젊음에 대한 의심이 피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20대 때야 주위에서 "넌 아직 젊다" 하니 생각하기도 힘들지만 30대는 다르다. "아직은 젊다고 하기에는 좀 나이가 들었지 않니?"라는 시선 감옥에 갇힐뿐더러 퇴사라도 하면 "그래서 앞으로 뭐 하고 먹고 살 건데?"라는 질문이 패키지로 따라붙는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나 '술꾼도시여자들' 같이 최근 호평받았던 작품들을 봤을 때 메인 주인공들은 대부분 30세, 혹은 30대 초반의 사람들이다. 그만큼 그 구간의 나이대가 이상과 현실의 교차점이기에 그려낼 풍경들이 지극히 공감대를 자극하는 것들이다. 앞길 창창한 커리어 우먼일 것 같았던 이상이 야금야금 갉아먹히는 30대의 현실이란 참으로 좋은 창작의 소재다.
저마다 다른 직업과 환경, 성격을 가진 세 여자들이 나와 자신들의 우정과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중 그 누구도 어느 하나 풍족하고 평탄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 않다. 30대는 정말, 그만큼 혼란하고 어쩌면 헬게이트의 포문을 여는 지점이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세상의 인류애에 대한 희망을 남겨두자면 30대는 지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살만한 지옥'이라는 점이다.
먼저 일적인 부분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책임자로서의 성공은 배의 뿌듯함을 주기도 한다. 동료나 후배가 고충을 털어놓고 나를 믿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는 건 내가 앞으로 깨달아갈 삶의 의미 중 하나처럼 자리 잡아 기쁜 순간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가치관이 달라진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다 떨어져 나가지만 반대로 인간관계가 정리되어 오히려 동일한 가치관과 함께 여생 동안 끈끈하게 뭉칠 수 있는 인연을 남겨두게 만든다.
건강의 경우에도 검진을 오히려 20대보다 더 많이 받게 되고 그 덕분에 기이한 자기 관리의 변화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전처럼 다음날 현관 신발장 앞에서 눈을 뜨는 모습이 아닌 술도 줄이고 몸도 아끼는 그런 긍정적인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된다. (쓰다 보니 반성하게 된다. 난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것인가.)
최근 본 영화에서 "50대는 지천명이라는데 내 인생 XX 허접해"라는 대사가 나왔다. 그 대사에 30대인 내가 공감했던 이유는 아마 시간이 흘러가면서 또 다른 40대의 고민, 50대의 고민들이 우리를 괴롭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마라톤이고 30대는 그저 수많은 출발선 중의 하나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렇게 책에서 말할 수 있는 고민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나만 홀로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그러고 사는구나' 할 수 있는 30대라면. 지옥불이 겨울날 핫팩처럼 온화하게 느껴지는 그런 구간도 가끔 존재하는 지옥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 세상 염세적인 내게도 아직은 꽤 살만한 지옥이다, 30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