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마르크스 무천년주의

왜 실패한 그가 아직도 성불할 수 없는가

by 임지성의 생각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_요한계시록 20:6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리라."라는 묵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천 년의 곱절을 견딜만 한 인내력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정황에 맞추어 이해되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는 "빨리 오셔서 구해주십시오."의 의미로,

* 전천년 재림설.

살림살이 나아진 진 뒤에는 "태평성대를 이루게 해주시고 천천히 오시옵소서."의 의미로,

* 후천년 재림설.

상식과 교양을 의식하는 지성인들에게는 '공동체의 실천을 통한 신의 다스림'의 의미로 읽혀왔다.

* 무천년 재림설.

흥미로운 점은,
아무리 어떤 신자가 철학적인 관점에서 무천년을 지지하더라도 (그가 성서 자체를 역사적 문예로서 진지하게 취급한다면) 위 구절의 본 취지가 '전천년'에 가깝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이 위 본문 저술 당시의 독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였기 때문이지.

하지만 묵시라는 장르가 상황적인 읽기(현재 독자 상황)에 유연하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 전천년의 의도와 무천년의 적용 ]이 꼭 모순적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마르크스의 저술도 이런 식으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명확한 낙관론과 행동주의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취지는 그가 죽은 뒤에 오용된 방식과 다르다.

그는 예수만큼이나 교리 제작과 무관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원리는 그때그때의 구체적 상황으로부터 나와야 함을 강조했다.

교조주의와 전체주의의 책임을 마르크스에게 묻는 게 타당하다면, 종교 전쟁을 예수 탓으로 돌리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기본 취지를 모르는 자들의 기본 자세는 혐오이지만, 맹목적인 혐오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헤겔식 '부정의 변증법' 이해하지 못해야만 마르크스를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와 연결시켜 혐오할 수 있다.

'부정의 변증법'이란, [1] 인간의 지성이 언제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며 늘 모순과 한계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인정, [2] 인간 지성이 그 모순을 인식하기에 기존의 것을 부정하게 된다는 생산적인 부정성, [3] 거기서 새로운 정립이 시작되더라도 여전히 부분성과 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어 이전 것을 계속 부정하거나 바꾸며 나가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마르크스의 묵시는 이제 [ 전천년의 의도와 무천년/후천년의 적용 ]이라는 눈으로 읽혀야 한다.

앞으로도 계급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공산사회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과 삶이 상품으로 전락하고 상품과 자본이 주술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동안,
마르크스의 유령도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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