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덥지 않은 이야기

시인의 말 - 최승자

by Suzanne

어떤 시들은 시보다 시인의 말이 더욱 시적이다. 사실 시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장르의 글에도 해당되는 말일테다. 책보다 좋은 추천사, 소설보다 뛰어난 평론… 어느 인터뷰에선가 신형철 평론가께서 학창 시절부터 작품 해설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던 사람이라 자신을 소개한 것을 보았다. (나도 그랬는데…) 작품을 뛰어넘는, 혹은 그 작품을 총망라하는 몇 마디는 단순한 글자 이상이다. 그 자체로도 작품이 되는 듯하다. 시인의 말만 모아서 읽고 싶어 지듯이… 작년에 출간된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권호 ‘시는 나를 이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는 그러한 시인의 말만 모아서 출간한 특별호이다. 시인의 말이 시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렇게나 수요가 높다는 것!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


대개 표지-목차-시 순서로 펼쳐지는 시집에서 시인의 말은 표지와 목차 사이에 위치한 채 독자를 맞이한다. 독자에 따라 목차나 시인의 말 따위는 괘념치 않고 넘어가는 이들도 있겠으나 나는 도무지 아리송하기만 한 시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안전벨트라고 생각하며 한 글자씩 꼭꼭 씹어 읽는 편이다. 그중 최승자의 시인의 말은 마치 연작처럼 이어지는 듯하여 내가 참 좋아한다. 무심한 듯, 미사여구는 다 뺀, 전할 말만 내어놓는 문체에 담긴 시인의 삶. 시인에 따라서는 시인의 말을 시 한 편보다 길게 쓰는 분들도 있다. 나의 경우 그런 시인의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기니까. 물론 길어야만 전달할 수 있는 말도 있지만, 나의 경우 말이 너무 긴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압축 진공팩에 담긴 것처럼 단 몇 글자에 꾹꾹 눌러 담아, 한 글자 한 글자가 묵직한 글이 좋다. 최승자의 시인의 말이 그렇다. 그의 작품 자체도 그런 편이다. 그래서 그를 참 사랑한다.

젊은 시절의 최승자 시인




제1부는 올해 1981년에 쓴 시들을 나의 생각대로,
제2부는 1977년부터 1980년까지의 시들을 씌어진
순서대로, 그리고 제3부는 대학 3학년때부터 대학을 그만둔
해까지의 시들을 역시 씌어진 순서대로 묶은
것이다.

최승자

1981년 출간된 최승자 시인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의 시인의 말이다. 덤덤히 자신의 시를 소개하는 것 외엔 다른 말이 없다. 작품에 대한 해설도 없이 그저 창작 시기만을 명시하고 있다. 시집에 작품이 수록된 순서도 작품을 구성하는 의미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저 창작순이다. 어떠한 가식을 내비치기 위함이 아니라 글을 써야만 살 수 있었던 자의 심정이 드러난다. 이 사람에게 글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이나 자랑거리가 아니라 속풀이다. 이러한 그녀의 작시법은 1993년 출간된 <내 무덤, 푸르고>의 수록된 ‘워드 프로세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쓴다는 것이 별것은 아니라고,
쓴다는 것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
그러나 이제 고백하자, 시인하자.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면
내 삶은 아주 시시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
어쩌면 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오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 놓았던가를
내가 얼마나 깊이깊이 중독되어왔다는가를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겠구나.
내 익숙한, 잘 나가는 달필을 버리고
원고지를 버리고 노트를 버리고
글자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자꾸만 목이 말라
더듬 더듬 떠듬 떠듬 처음으로 워드 프로세서를 치고 있는 이 밤에.

최승자, ’워드 프로세서‘


어쩌면 글자의 숙주로 살기 위해 태어난 자일지도 모른다는 시인의 의식이 담긴 고백이다. 그의 삶은 글을 따른다. 그의 글은 시를 따른다.




오랜만에 시집을 펴낸다
오랫동안 아팠다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

2010년 1월
최승자


2010년 출간된 <쓸쓸해서 머나먼>의 시인의 말이다. 그간 시인은 병마와 싸우며 한바탕 신비주의의 세계를 탐험하고 왔다. 이 시기에는 행방이 묘연하던 최승자 시인이 우리 곁으로 돌아와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나에게 최승자 시인의 첫인상도 이 시기의 모습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의 인터뷰를 읽었고,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바싹 마르고 푹 패인 볼을 가진 얼굴, 빛 한 점 들어서지 못 할 듯이 새카만 눈동자가 주는 인상과 감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새천년 이후의 10년간의 생활에 대한 묘사는 나에게 묘한 공포감과 위압감을 주었다. 압축된 억겁의 세월을 온몸으로 맞고 돌아온 그녀는 새로운 시집을 발간하며 단지 3줄로 모든 것을 요약해 버렸다. 어떤 고통들은 너무나 거대해서 아무리 자세히 묘사하려 해도, 하려 할수록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치 비누를 물 묻은 손안에 넣고 하염없이 굴리면, 굴리고 또 굴릴수록, 손아귀에서 튕겨나가 곰팡이 핀 화장실의 타일 바닥에 떨어지듯이. 최승자는 시커멓게 더럽혀진 자신의 손으로 비누를 잡아 비누에 얼룩을 남기는 대신 흐르는 물에 손을 대고 비벼대며 손바닥의 마찰로만 그 찌꺼기들을 하수구로 흘려보낸다. 이것이 최승자의 언어 사용법이다.




2020년대에 들어서 최승자는 산문집을 출간하였다. 새로운 산문집은 아니고, 오래전 세상에 나왔다가 사라진 책에 몇몇 글을 덧붙여 복간한 것이다. 1989년 출간되었던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의 개정판 시인의 말은 이러하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2021년 11월 11일
최승자


오랜 시간 활동하는 창작자들, 비단 창작자뿐만 아니라 삶을 사는 인간 모두는 과거의 자신과 작별한다. 마치 곤충처럼 탈피의 과정을 거쳐 완전히 다른 자로 변모하기도 한다. 과거의 나를 끌어안은 채 놓지 못해 함께 썩어가는 자들도 적지 않다. 이와 달리 시인의 말에서 최승자는 작별했던 과거의 자신과 오랜만에 조우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잠시 그와 마주하면서 머릿속에 스쳐가는 그때의 내가 갖고 있던 생각들로, 그와 내가 같은 몸과 역사를 공유하는 동일인물임을 자각할 뿐이다. 그의 몸을 다시 입으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도 ‘쿡‘이라는 의성어 하나에 일장춘몽인 코미디가 되기 직전이다. 작가이자 독자인 자신에게 웃음을 주지만 웃을 일은 아니라고 단정 지으며 다시 한번 장르를 다잡는다. (최승자의 시는 코미디인가 다큐멘터리인가. 시에서 그는 마지막 연 즈음에 다다르면 시종일관 시니컬한 위트와 유머를 구사하지만… 여하튼.) ’워드 프로세서’에서 멈추지 못하고 써야만 해야 했던 시인은 펜을 내려놓는다. 글쓰기를 중단하는 데에도 긴말은 필요하지 않다. 그만 쓰자라고 자신에게 말을 건네며, ‘끝‘이라는 글자로 막을 내려버린다. 완전한 단절이다. 과거는 과거로 흘러간 것. 그것이 종이에 갇힌 것일지라도, 영원한 문학으로 남더라도 장황한 의미는 갖지 않을 것이다. 최승자는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냈다. 그 최승자는 과거에 존재했었던 자에 불과하다. 그때의 최승자가 존재했기에 쓸 수 있던 작품이다. 지금의 최승자는 그 글을 쓸 수 없다. (이런 글을 두 번씩 써서도 안 될 것 같지만…)


1995년에 출간되었다가 복간된 <어떤 나무들은>은 최승자가 아이오와에서 지낸 몇 달간의 일기를 모은 형식의 수필집이다. 이 책에서도 최승자는 비슷한 뉘앙스로 시인의 말을 남긴다.


청춘이 지난 지 하많은 세월이 흘렀다.
문득 소식이 와서 묻혀 있던
책이 지금 살아나고 있다.
그것을 나는 지금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아이오와는
좋아했었다.

2021년 11월 15일
최승자


제 아무리 제 것이었던, 대부분의 인간들의 생애주기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로 불리는 ‘청춘’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음에도 시인은 동요하지 않는다. 넘볼 이유도, 그리워할 이유도 없는 탓일까. 아니면 그 감정을 넘어서 닿을 수 없는 허무임을 알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시선을 거두지는 않는다. 회상에 대한 무심함은 청춘과 지난 시간에 대한 부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아이오와에 대한 평가를 덧붙이며 그 시절의 한 자국을 기념품처럼 찍어 남긴다.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보다는 좀 더 감정의 온도가 높다. 과거의 기억 중 다른 것이 어떠했든 간에 그중 아이오와만큼은 좋아했었다고. 하지만 역시나 ‘좋아했다‘도 아닌 ’좋아했었다’로 과거의 자신에게 그 평가의 주체를 떠넘기며.




마지막으로, 산문집에서 과거와 거리 두며 어느 잣대도 들이대지 않은 채 무심히 바라만 보던 것과 달리, 1999년의 시집 <연인들>을 복간하며 쓴 시인의 말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풀어놓는 산문과는 다르기 때문일까. 고통은 아름답지 않다. 그럼에도 고통은 아름다움을 낳을 수 있다.


절판되었던 시집을 다시 펴본다.
절단되었던 다리가 새로 생겨나오는 것 같다.
무지막지한 고통 속을 달려왔던 시간,
무지막지한 고통 속을 헤매었던 시간,
그 순간들이 점철되어 있는 이 시들이
어떻게 이렇게도 숨겨져 있을 수 있는지
가히 참, 아름답다.

2022년 1월
최승자


과거의 생각, 과거의 태도, 과거의 경험 그 자체를 다시 마주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로 인해 그가 쓴 작품들을 다시 마주했을 때 시인은 내가 꼭 필요한 것이나 잃고 있었던 것을 되찾는다. 늘상 단절감을 유지하며 자신의 이야기조차 담백하고 말을 아껴 전달하던 시인은 시집에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의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감탄한다. 고통의 시간이 시집으로 변모하여 다시 찾아왔을 때 시인은 생명감을 느끼며 맞이한다.

추측건대 이 시집이 시인에게 갖는 의미 때문에 더욱 동요했을지도 모른다. 99년 초판에서 최승자는 이례적으로 3쪽이 넘는 시인의 말을 남긴다. 이론 중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한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을 들먹이며 길고 길게 자신의 시적 세계관을 설명한다. 웅녀, 페르세포네, 신화 속 여인들… 신비한 여성의 이미지들을 마지막으로 던진 채 시인은 10년간 차원 너머의 세계를 탐험하고 왔다. 고통의 절정이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또 다른 자신이 창조되었기에, 자신에게 더욱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환상병의 문턱 앞에 선 최승자를, 그 환상에서 탈출하듯 빠져나온 최승자는 그때 그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름답게 바라본다. 그것은 시인이 지닌 창조의 힘이었으니까. 이토록 시인의 말은 작품의 세계관과 작가 개인의 삶을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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