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 - 최승자와 자우림
한 번 설정된 구조는 붕괴시키고 재건설하기 어렵다. 구조가 구성원들에게 지키도록 강제하는 일들이 있다. 지구별에서는 중력에 복종하여 단단한 땅 밑에 붙어있을 것, 아가미 없는 생물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을 것, 이를 따를 수 없다면 존재할 수 없을 것. 구조는 순조로워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때로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사실 그 ‘누군가’도 고정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는 비행기를 발명하고 스노클링 장비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규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다.
인간은 철저히 혼자라는 감각을 느낀다. 그 감각은 외로움이다. 외로움의 지속은 괴로움을 가져온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에 속하고자 한다. 사회는 구조다. 구조 속에서 소외되는 자가 있다. 그 자는 필시 외로움과 괴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라도 그 자가 될 수 있다.
언제라도 우리는 그 고통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그 감각을 해소시킬 수 없다.
외로움과 괴로움은 보편적이면서 특수적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각자 개인의 것으로 가진다.
그 사실이 우리를 영원히 분리한다.
외로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자는 지금, 현재, 여기의 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를 벗어나기만 하면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착각이 아닌 진실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내가 엉망이기에, 혹은 지금 엉망인 것들이 나를 향해 목을 조르려 달려오고 있기에 이 순간만 아니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 외로움과 괴로움에 관하여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구조와 맥락으로 이야기한 한 편의 시와 한 곡의 가사를 가져왔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중략)
풀리지 않는 의문들 정답이 없는 질문들
나를 채워줄 그 무엇이 있을까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살아 있다는 괴로움
자우림, 샤이닝
‘샤이닝‘에는 외로움의 원인이 명시되어 있다. 이유가 없는 것이 이유이다. 그 원인이 머리로 생각하여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감정의 영역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기에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 지금 상태, ‘살아 있음’이 고통 그 자체로 다가온다.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찾으며 힘들어한다. 다만 두 작품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최승자는 그것을 과거로 화살을 돌려 찾고 자우림의 노래는 어느 시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최승자의 시에는 ‘그리움‘이 등장하니까.
이것만 제외한 모든 것이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 장소와 시간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그들.
이는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의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용해지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이곳에서 이들은 병든 자들이다.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외로움, 괴로움, 그리움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영원히 청춘 주위를 빙글빙글 돌테니. 옴짝달싹 못 하고 갇힌 이곳에서, 답답한 감각이 사라지는 곳 혹은 이 감각이 병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세계로 나아간다. 지금의 묵직한 짓눌림은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있다고 상상해보라고 말을 건네는, 의외로 고통은 그런 힘을 가진다. 여기, 이 둘과 같은 생각을 한 선구자들이 200년 전 파리에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같은 감각을 공유한 자들, 병든 자들, 현실에서 지옥을 살며 아름다움을 노래한 보들레르와 베를렌느의 시를 읽어보고자 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