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조건, ‘머물기’ - 보들레르
목적지가 없는 탈출
시인들은 몸과 정신이 머무는 이 세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병든 존재이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늘 다른 세계를 갈망한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보들레르 이전에 이토록 명시적이고 처절하게 다른 세계를 원한다고 표현한 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정확히 ’지금, 여기’를 제외한 모든 곳이면 모두 괜찮다고 말이다. 아마 보들레르를 최초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시는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 수록된 작품이다.
N’importe où! N’importe où! pourvu que ce soit hors de ce monde!
어디라도 상관없다! 어디라도 상관없다! 이 세상 밖이기만 한다면!
Charles Baudelaire, N’importe où hors du monde
샤를 보들레르,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라도
이 시는 두 명의 인물이 대화를 주고받는 형태로 전개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곳에 가서 살아보는 것 어떠겠니, 저곳은 어떨까 제안을 해보지만 듣는 자는 묵묵부답, 응답하지 않는 태도를 고집한다. 계속해서 말이 없던 청자가 마지막으로 위 시구를 소리치며 시는 끝난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제공하는 나라도, 죽음을 품은 나락도, 적극적으로 원하는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닌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만을 바란다.
탈출을 포기하고 지옥에 머물며 아름다움을 탐구하기를 택한 자, 시인
그러나 보들레르의 미학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모두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탈출하는데 철저히 실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의도된 실패인지, 실수로 인한 실패인지, 철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온갖 방해에 의해 좌절된 실패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시인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탈출하는 것을 실패하거나 포기한 자’이다. 보들레르의 경우에는 포기한 자라고 볼 수 있겠다. 그 이유는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라도‘의 내용에서 서술되는 보들레르(혹은 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인)의 심리와 모순되는, 시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미학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상징주의적 선언은 ‘상응교감(Correspondance)’에서 이뤄지지만 미학적 선언은 ’미의 찬가(Hymne à la Beauté)에서 이뤄진다.
(한국에서는 주로 ’미녀 찬가’로 번역하지만 나는 여자 인간으로 이미지를 한정하는 것에 반대하므로 미라는 더 큰 개념으로 옮기는 것을 선호한다.)
Viens-tu du ciel profond ou sors-tu de l’abîme,
O Beauté? ton regard, infernal et divin,
Verse confusément le bienfait et le crime,
Et l’on peut pour cela te comparer au vin.
너는 깊은 하늘에서 오는가 심연에서 나오는가,
오 아름다움이여? 너의 눈길, 지옥이자 천상이며,
축복과 타락을 혼란스럽게 쏟아붓으니
이 때문에 너를 포도주에 견줄 수 있다.
Charles Baudelaire, Hymne à la Beauté
샤를 보들레르, 미의 찬가
보들레르 이전 서구 사회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내려오는 플라톤 미학의 영향으로 ‘진선미‘로 대표되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는 진실된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참=착함=아름다움‘의 공식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참’은 이데아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현실에서 직접 마주할 수가 없다. 살아있는 인간은 그저 태양빛에 반사된 그림자에 불과한 가짜만을 좇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저 너머의 미학이 이 세계에서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우리만의 미학을 재설정한다. 전통적 미학을 뒤집는 것이다. 추악한 것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이롭지 못한 것이 유혹적이고 죽음으로 이끄는 길에 아름다움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어 그대로 엎드려 핥아먹을 수밖에 없는 구차한 모습들… 아름다움의 현실적 재발견, 허름함에서 아름다움을 발굴해 낸 보들레르의 업적. 그것은 그의 대표작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악에서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찬미하기, 혹은 추악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꽃을 한 번 피워내 보겠다는 실험적 선언.
어쨌거나, 보들레르가 선언한 현대적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고통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주체는 현실 세계의 살아 숨 쉬는 우리이고,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계로 가볼 수 없으니까. 만약 보들레르가 고통이 없는 추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선택지가 존재했다면 그는 떠났을까. 시인의 눈 앞에 너무나 풍부한 창작의 원천들이 펼쳐져 있기에… 나는 아니라고 본다. 시인은 이곳에서 명확히 고통스럽지만 확실히 아름다운 것 혹은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단서들을 발견하여 그것들을 좇고 있다. 수사 결과 보고서가 바로 그의 시집이다. 여기에는 확실한 고통과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과연 저 세계에도 확실한 것이 있을까? 내가 시인이라면, 여기 이렇게 분명하게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버리고 불확실한 평안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곳은, 평안함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아름다움이 보장되지 않는 곳. 최승자가 자신의 산문집에서 말했듯이,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 “
확실한 절망에는 늘 순도 높은 아름다움이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시인은 그것을 탐구하는 데에 자신의 사명을 두었다.
(오늘 보들레르의 시는 직접 번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