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과학의 존재 이유 -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노래 가사도 시가 된다
잘 쓰인 가사는 운율을 지니고 함축적 의미로 독자(혹은 청자)에게 다가간다는 점에서 시라고 볼 수 있다. 잘 쓰였음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겠으나 특히 예술적, 문학적으로 잘 쓰였다는 것은
1. 문학적 & 철학적으로 어떤 인간사의 본질을 꿰뚫으면서도
2. 아주 대중적이고 어렵지 않은 일상어로 쓰였지만
3. 그 문장의 의미는 꽤나 낯설은…
4. 하지만 그 문장을 보자마자 너무나 익숙한 감정이 불쑥 솟아오르는!
그런 글이 장르를 불문하고 정말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한국어 노래 중 가장 잘 쓴 가사는 무엇이나 묻는다면, 단연코 브로콜리너마저의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이 한국어 가사 중 최고로 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답할 것이다. (사실 나는 유다빈밴드의 드라마틱한 기승전결로 연극 한 편을 보는 듯한 구성의 편곡을 훨씬 좋아한다. 원곡은 너무 단출하고 검소한 인디 음악 감성이야… 그러나 어쨌든 가사는 윤덕원 씨가 썼으니.) 영어로는 “can’t soothe by love”라고 소개되는데, 보자마자 사업 결과 보고서같이 딱딱하고 재미없어지는 점에서 한국어 특유의 문학성을 꽉 잡았다는 점까지 강조된다. ‘사랑으로 진정/치유될 수 없는’ 이라니… 의미는 같으나 글자 자체에서 오는 신비감이 축소된 느낌.
Love wins… always?
사랑과 우울은 모든 창작자들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영감의 원천, 뮤즈다. 이것이 없었다면 예술은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이 두 주제로 만들어지지 않은 극, 음악, 미술, 춤…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기도 하다.
이 둘은 모두 사람을 탄생시키거나 소멸시키는 성질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사랑은 언제나 이기는 것, 우울은 언제나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사랑은 분명히 인간을 탄생시킨다.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인간이 계속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리고 우울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약하게 만든다. 극심히 지속되는 경우 죽음에 이르게 한다. 과연 이게 다일까? 정열이 과도히 흘러넘쳐 한 사람을 덮치려 할 때 우울은 그가 자제력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며 잠재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때로 사랑은 한 사람의 삶을 파괴시키기도 한다. 우울이 만악의 근원인 것도 아니고, 사랑이 만병의 통치약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줄곧 이분법적 시각으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곤 한다. 그러나 분명히 이 관점이 힘을 잃고 좌절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이 바로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의 말뜻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런 날이 있어 그런 밤이 있어
말하지 아마도 말하지 않아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넌 말이 없었지만
그런 말이 있어 그런 마음이 있어
말하진 않았지 위로가 되기를
이런 말은 왠지 너를
그냥 지나쳐 버릴 것 같아서
Love can break throw all the walls… 사랑은 모든 벽을 허물 수 있는 것, 뚫을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되곤 한다. 그러나 사랑조차도 무너뜨릴 수 없는 깊은 상심의 골짜기를 마주하면 알게 된다. 상심은 뚫고 무너뜨릴 수 있는 벽의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앞에서 사랑은 무력해진다. 준비해 온 것을 꺼내어 보여주지 못하고 그 고통만을 바라만 보며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기원전의 조상들은 사고는 머리에서, 감정은 심장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많은 문화권에서 마음과 심장은 같은 단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랑의 상징인 ‘하트’ 기호와 단어 역시 심장이지 않는가. 이후 과학의 발전으로 사고가 머리에 위치한 뇌라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혀냈고, 사실 마음이라는 것도 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밝혀내었다. 오랜 시간 마음은 심장이 관장하는 영역이라고 믿어온 까닭은 우리가 기쁠 때, 슬플 때, 화날 때, 항상 가슴 부근이 메어왔기 때문일 테다. 사실 그 또한 뇌에서 신경을 통해 전달된 전기신호들이 주는 신체적 반응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에서야 밝혀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 특히 뇌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다. 감정은 더욱 그렇다. 꼭 나의 꿈이 좌절되어야만, 곁에 누군가가 사라져야만, 사람들에게 상처받아야만 어두운 감정이 유발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생물학적 몸이라는 공장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감정 생성 과정들이 늘 외부 요인의 영향만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서는 관찰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간접적 도구들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생물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매우 한정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노래의 화자가 어떠한 이유로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일 그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바꿔도 나아질 수 없는 생물학적, 신경학적 결함을 타고나게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단순히 사랑한다는 말로 그를 구원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존재 양식, 정체성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울한 것도 아니다. 사랑을 준다고 우울이 해결되지도 않는다. 우울한 마음이 사랑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사랑을 준다고 나아지지도 않는다. 우울의 인지적 원인을 살펴보면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언제나 합리적 사고만을 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가버려 바꿀 수 없는 과거의 경험과 사건, 선택을 두고 밤낮으로 땅을 치며 후회하기도 한다. 내가 도무지 가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갈구하는 마음을 거두지 못해 스스로를 옥죄기도 한다. 이런 인지적 오류에서 사랑을 준다고 그 인지가 수정되기는 어렵다. 그것은 망망대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에게 납으로 된 묵직한 덩어리를 튜브랍시고 던져주는 행위에 비할 수 있을 테니.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이렇게 어느 정도 우리의 고통과 우울에는 원인을 알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또한 우리의 고통과 우울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도 존재한다. 우리의 말은 오해를 불러온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아프지 않고 편안하길 바란다. 그 마음을 담아 언어로 건네보아도 어느 날에는 그것이 공격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는 언어의 한계이기도, 이 언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의 몸 혹은 정신의 상태가 고갈되어서 일수도 있다. 아무리 좋은 마음과 말이라도 내 몸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그 모든 것들이 흡수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것‘이다. 또는 내가 힘든 모습을 상대에게 감추고 나 스스로에게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면, 건네받는 사랑은 동정이나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위로가 아닌 훈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Love wins… 사랑이 언제나, 항상,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격언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바람에서 비롯된 것인지.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이라는 표현은 사랑의 낭만성을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자신의 어둠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사랑의 한계를 깨달은 자
이 노래의 등장인물 중 아파하고 있는 대상은, 자신이 사랑한다는 말로도 나아질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는 상태에 놓여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직 이 어둠에서 벗어날 뚜렷한 해답을 찾지는 못 한 듯하다. 상대에게 나의 아픔을 털어놓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아픔을 털어놓으면 상대도 같이 힘들까 봐, 힘듦이 2배가 될까 봐, 내가 약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등등.
정작 힘겨운 날엔 우린
전혀 상관없는 얘기만을 하지
정말 하고 싶었던 말도
난 할 수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깊은 어둠에 빠져 있어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사랑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을 마주했을 땐, 그저 몸을 웅크리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중에는 바람을 포기하고 그 어둠의 절곡으로 몸을 맡기는 자들도 더러 있지만. 이 가사에서는 ‘우리‘로 불리는 여러 화자가 등장한다. 아마도 둘 정도일 것이고, 그중 하나는 깊은 어둠의 수렁에 빠져있다. 둘은 아마 서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둠에 빠져있는 자는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을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고개를 들면 저 밝음 속에 있는 상대의 손을 차마 놓아줄 수가 없어,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버틴다. 손을 잡고 있는 상대는 그를 끌어올려 건져내고 싶지만 그럴수록 늪에 빠진 듯 더욱 가라앉을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손을 놓고 저 아래로 추락하게 둘 순 없어 그저 붙잡고 놓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정말 하고 싶은 사랑한다는 말, 어서 이곳으로 올라오라는 말, 올라가겠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의 무력함을 직면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까 두려운 마음은 그들은 전혀 상관없는 말만을 하도록 만든다.
심리과학의 존재 이유
사랑의 한계를 깨닫는 지점에서 심리학이 시작된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이야말로 왜 문학을 사랑하며 심리학을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완벽하고 간결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상처받은 자에게 사랑한다는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너무나 깊은 상처에는 그 연고가 말을 듣지 않는다. 상처가 사랑을 침몰시킨다. 이 역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심리학이라는 과학적 방법의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내게 심리학의 정의이자 본질이고 쓸모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절대적이거나 낭만적인 방법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다. 세상에 당연하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리의 고통을 차분히 하나씩 해부해 보고, 언어화하여 개념을 뭉쳐낸 뒤, 가설을 세워 실험해 보고 결론을 도출해 상용화하는 과정을 도입해 내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언어라도 그것이 공허하게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과학을 찾아 나서야 한다. 언제나 말이 앞서고 행동이 뒤따르지는 않는다. 고통이 압도하는 순간에는, 말보다 행동을 앞세워 그곳을 빠져나온 후 언어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 이 길에 오기까지,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이라는 노래 가사는 너무도 훌륭하게 사랑(혹은 문학, 언어)이 무력해지고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을 너무도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해 낸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