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주가 되어준 원룸의 기억들
대학생때부터 직장인이 될 때까지 원룸에서 살아왔다. 성인이 된지 어언 10년이 다 돼가는데, 지방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청년에게 주거의 옵션은 다음과 같다. 본가에서 통학, 고시원, 자취방, 기숙사, 쉐어하우스. 나는 기숙사 + 자취방 콤보를 선택한 사람이고, 지금껏 내 인생의 길목에는 세 개의 자취방이 있었다. 자취생활은 상상했던 것만큼 낭만이 넘치지는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자잘한 집안일들이 쌓여 주말에는 집안일에 파묻혀있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새삼 이 한 몸 데리고 살아가는 행위를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만년 기숙사 생활을 탈출하여 진정한 성인의 자유를 누려보고 싶다는 치기어린 호기심에 시작한 자취였다. 통금이 없는 세상은 아름다웠다. 친구들과 더 찐한 우정을 나누며 술잔을 부딪힐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 무렵 친한 친구들 대부분이 같은 동네에서 자취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친구와 밤 늦게 각자의 자취방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기분은 그 시절 내가 느낄 수 있는 청춘의 행복 그 끝판왕 어딘가쯤 있었다. 방은 정말 좁아터졌고, 가끔 벌레도 나왔으며, 방 구조는 찌그러진 육각형이어서 행거를 어떻게 놓아도 공간이 남았다. 계약이 만료되기 직전 어느 여름, 폭우가 왔는데 옷장 벽쪽에 곰팡이가 펴서 죄다 세탁소에 맡겨야 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방이 좁고 햇빛이 잘 들지 않아 빨래는 잘 마르지 않기 일쑤였고, 세탁소에서 드라이클리닝 말고 진짜 빨래도 해준다는 걸 이 때 처음 알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는 그런 곳에 살지 못하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저 그 6평 남짓한 공간이 참 사랑스러웠다. 아무리 작아도, 주방과 화장실과 세탁기까지 버젓이 갖춰진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데서 오는 감동은 엄청났다. 심지어 바퀴벌레가 나오고, 돈벌레가 나오는 열악한 방이었음에도 알바나 인턴을 하고 돌아와 전자레인지에 고등어 하나 돌려먹고 맥주 한 캔으로 마무리하는 하루는 정말 꿀맛이었다. 기숙사에 살 때는 전자레인지를 쓰기 위해 5층에서 1층까지 내려갔어야 하고, 빨래를 하려면 지하 1층까지 내려가야 했다. 밤 늦게까지 약속이라도 있는 날에는 새벽 2시 통금시간을 지키거나, 벌점을 받거나, 아니면 새벽 5시에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밖에서 죽치고 있기 부지기수였다. 통화를 해도 룸메이트의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가서 조용히 해야했고, 서로의 수면 시간이 맞지 않으면 안대를 끼거나 귀마개를 껴야했다. 자취를 한 이후로 명확하게 주어진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참 반가웠다.
직주근접이 매우 중요한 가치였던지라, 그리고 새벽 통근이 정말 자신이 없었던지라, 걸어서 1분 거리에 회사 셔틀이 있는 곳에 방을 구했다. 이전 자취방보다 훨씬 넓어졌지만 원룸은 여전히 원룸. 잠시만 살 거라고 생각하며 짐을 최소로 간추려 생활했지만, 계약이 연장되고 또 연장되면서 어느덧 4년을 살다보니 버젓이 침대도 있고 소파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색깔로 가득찬 내 방이 되어있었다. 이 때였던 것 같다. 자취하는 나의 삶을 ‘임시로 잠시 거쳐가는 삶’이 아닌, ‘하루하루가 소중한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혼자 산다고 해서, 내 우주가 되는 공간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내게 있어 주거공간은, 삶의 만족도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오는 날 창 밖으로 보이는 대로변에 가로등 불빛이 번져있는 것을 보는 게 좋았고, 오후 출근하는 날에 문득 새벽에 눈을 뜨게 되면 눈 앞에 지나가는 셔틀을 구경하는게 좋았고, 주말 오후에는 털레털레 빨래방에서 가서 영화 한 편 때리며 이불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던 여유가 좋았고, 주방이 비교적 넓었던지라 닭고기, 아보카도, 수박과 같은 새로운 재료들로 요리를 해먹는 것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좋았는데, 그 방에 살 때 당시에는 낡았다느니, 관리비가 많이 나온다느니, 방이 너무 좁다느니 하며 나름의 불평거리를 찾아냈던 것 같다.
이사 나오는 날, 그래도 잊지 못할 추억들과 함께 나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품어줬던 그 방이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부터 이사를 여러 번 해봤던지라, 짐을 싸고 푸는 것은 낯설지 않고 비교적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몸이 고된 건 사실이다. 새롭게 얻은 방이 이전에 살던 곳들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서울을 벗어난 교외지역이다. 언니 부부가 살고있는 교외지역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만족스럽고 여유로워보일 수가 없었다. 좁고, 시끄럽고, 매연이 가득한 서울 한복판에서의 삶이 지쳤던지라 더욱 교외지역의 삶에 끌린 것 같다.
둘째로는, 원룸 탈출. 1.5룸이라는 유형의 이 방은 고작 침실과 거실을 미닫이문 하나로 분리해놓은 방이었는데, 그 차이 하나만으로 세상 그렇게나 넓어보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사오는 길에 거대한 소파도 구매했는데, 혼자 살더라도 넓은 소파에서 맘껏 뒹굴거릴 수 있으니 쉴 수 있는 공간에 다양성이 생겨서 더 양질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예전에는 음식을 하면 옷이나 침구류에 냄새가 베었고, 그걸 미처 인식하지도 못했었는데 이제는 훨씬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두 가지가 이제까지의 자취방들과 가장 큰 차이점인데, 이사 직 후 행복도가 이렇게 MAX에 가까웠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거주지에 대한 욕심이 커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을 쉽사리 꾸미지 못했다. TV도 놓지 않고 식탁도 놓지 않았다. 내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나 하나만 사는 공간에 돈을 더 투자해서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작 나는 그 삶을 임시의 삶으로 대하고 있었나보다. ‘“결혼하면 그 때부터“라는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왔다. 그 때까지는 작고 저렴한 방에서 돈을 모으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말에 반발심이 들면서도 정작 그 분들의 말씀대로 살고 있었다. 예쁜 가구를 두고싶은 마음이 들 때도 “어차피 또 이사갈건데, 짐만 늘어나지 뭐” 하면서 그냥 살림살이를 최소화하려는 방식으로 살아갔다. 그러다보니 참, 집이 점점 싫어졌다.
계속되는 야근에 정작 평일에는 잠밖에 자지 않았고, 집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주말밖에 없는데 주말에는 교외생활에서 벗어나 친구들을 보러 무조건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방을 꾸미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렇게 텅 빈 공간으로 들어갈때면 한없이 외로워했다. 악순환이었다.
주변에 전세방이 널려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방을 언제든 뺄 수 있는, 보증금이 많이 묶이지 않는 월세를 택했다. 얼마 이후 그 지역에 전세사기 뉴스가 터지며서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어쩌면 내가 됐을지도 모를 피해자들의 이야기. 그저 내 한 몸 잘 간수하고 싶을뿐인데 곳곳이 지뢰밭인 부동산 시장 속에서 나는 더욱 단단해져야 했다. 정말 내가 아끼는 공간에서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몸 한 몸 누일 공간, 출퇴근을 위한 기숙사같은 공간, 언제 할지도 모를 결혼을 준비하기 전 돈을 아끼기 위한 임시의 거처공간 말고, 진짜 내 인생을 꾸려나가고 추억을 쌓아나갈 공간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