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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게 Aug 08. 2023

'야, 술 잘 먹네'는 칭찬이 아니다

먹기 싫은 건 먹기 싫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 음주의 기록


술을 처음 접했던 기억은 초등학생 때였다. 할머니가 건네신 소주잔에 입술을 갔다 댔는데 으윽, 화한 냄새에 더해 난생처음 맛보는 약품같이 쏘는 맛에 '어른들은 이런 걸 왜 먹냐'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 안다'며 껄껄 웃으셨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나고 간 졸업 스키캠프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깠다. 남자애들은 대부분 이미 많이 마셔본 티가 났고, 그 경험을 자랑하듯이 이야기했다. 내 손에 들린 맥주잔은 마지 성인으로 가는 관문처럼 느껴졌다. 분위기상 '안 마신다'는 옵션은 없어 보였고, 나도 궁금했던 차라 단숨에 들이켰다. 우엑. 여전히 맛이 없다.


대학교 합격 후, 정식 오티 이전부터 크고 작은 모임들이 개최되었다. 그 자리에 당연히 술은 빠지지 않았고, '종교적 이유로 술을 안 마신다'는 친구들이 극소수 존재했지만 이내 재미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하며 모임에서 제외되기 일쑤였다. 이너써클의 친구들은 금세 술로써 공고히 다져진 관계가 되었다. 술을 먹고 누가 무슨 실수를 했고, 누가 어디에 토를 했고, 그런 식의 에피소드를 서로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새벽 1시 전에 일어나려고 하면 떼로 달려들어 서로 못 가게 막았다. 나는 아예 분위기가 무르익기 전인 밤 11시나 다들 정신을 못 차리는 새벽 2시쯤이 자리를 떠나기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걸 파악했다. 술 취해서 악력 조절도 못하는 친구에게 손목을 붙잡혀 멍이 든 적이 있는데, 그때 무서운 감정과 함께 '아, 이거 좀 아닌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지됐던 뭔가가 허용되면 억눌려있던 호기심이 배가 되어 폭발하기 마련이다. 술이 딱 그래 보였다. 그 이후로 술을 마실 때마다 꼭 퍼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다. 맛있는 술을 조금씩 조절하며 마시는 법을 배웠고, 좋은 요리와 함께 곁들여 먹는 법도 점차 익혀 나갔다.


하지만 미팅 자리에서 달라진 주량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주는 대로 마시다가 기억이 끊긴 그날 이후로 나는 술과 냉전을 선언했다. 별 일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집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못하는 상황에 당황스러움과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신용카드가 전부 없어져 아침부터 열나게 도난신고를 하고 방문을 여는데, 방문 앞에 고스란히 떨어져 있는 카드들을 보며 현타가 아주 세게 왔다. 신용카드로 문을 열려고 시도했던 건가, 알 수가 없다.




| 술, 마음과 입의 문을 여는 약


술은 사회적 관계의 윤활유처럼 활용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기억하는 모든 사회생활에서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 대한 압력이 항상 있어왔다.


완전히 회사라는 조직을 처음 겪어보던 인턴 시절에는 술자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인턴 하던 시절 '알파걸'로 불리던 카리스마 넘치고 아름다운 차장님이 계셨는데 일을 할 때는 매우 엄격하셨다. 그런데 회식 자리에서 만취를 하셔서, 과거 전 남자 친구의 바람과 뒤이은 분노의 소개팅 에피소드를 털어놓기 시작하셨다. 사적인 이야기에 더불어 욕설을 곁들이는 인간적인 모습을 느끼기도 했고, 다음날 좀 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대낮에 두 달짜리 인턴에게는 절대 말해주지 않았을 에피소드였을 테니 말이다.


웃긴 건 일찍이 만취하신 그 차장님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긴장이 좀 풀렸는지, 나도 주는 대로 술을 받아먹다가 기억을 잃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장면 속에서 나는 윗분들이 제안한 야자타임에 맞추어 하극상을 벌이고 있었는데, 다음날 안절부절못하며 실수한 건 없는지 선배들한테 계속 묻고 다녔다. 


당시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기억 못 하게 하려고 술을 마시는 거야. 다음 날 다 기억하면 민망하잖아."


그래서 술자리에서 술을 안 마시는 사람들을 별로 안 반기는 건가, 싶었다. 멀쩡한 정신으로 모든 걸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껄끄러울 테니 말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소개팅을 할 때, 회사 사람들과 친목도모를 할 때,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을 때, 몸과 마음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풀고 싶을 때 우리는 술을 찾는다. 술에 취하다 보면 어찌 된 게 평소 소심하던 사람도 용감해지고, 대담해진다. 그래서 사회생활 속에서 술은 언제나 우리의 가까이에 있다. 업무로 엮인 관계에 기름칠을 하는 정도의 용도겠다.




| 술을 거절하는 방법을 묻는 사람들


회사를 어느 정도 다니고서는 꽤나 솔직하면서도 융통성 있게 술을 거절하는 방법을 배웠다.


"아이, 과장님. 저 오늘 운동 가야 돼요~"


다행히 윗분들도 존중해 주시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회식자리나 좀 덜 친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술을 안 먹는다고 하면 꼭 이런 질문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왜? 약 먹는 거 있어? 몸 어디 안 좋아?" 


내게는 꼭 술을 안 먹는 적합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혹여나 이어지는 질문이 있을 수 있으니 부가설명 준비는 필수다. 대화는 대충 이렇게 이뤄진다.


"아, 네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약을 먹고 있어서요."

"어~ 어디가 안 좋은데?"

"아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어 그래? 아까 점심은 좀 잘 먹었나? 오늘 이거 고기 먹는 거는 괜찮은가?"

"아, 네. 다른 배라서요..."

".... 아 그렇군, 그래그래."


생리통 핑계 + 진통제 조합이 제일 만만하다. 진짜 약을 먹는 시기에는 일부러 다들 보시라고 약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기도 하고, 고기 한 점 먹고서 약봉지를 탈탈 털어먹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지금 술을 일부러 빼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못 먹는 겁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다.


인터넷에 술 거절하는 방법을 치면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고민거리가 쏟아져 나온다. 나도 이런 걸 열심히 검색해 봤던 한 사람으로서 웃프지만 진지하게 바라봐야 할 현실이랄까.




회사 입사 당시 흥미로운 교육자료가 있었다. 회식 자리를 터무니없는 이유로 피하는 신입사원에 대한 에피소드와, 그에 대한 상사의 적절한 대처 방법을 고민해 보라는 토론 과제였다. 그 자료에서 신입사원의 핑계는 '오늘 보일러 기사가 와서 집에 일찍 가봐야 합니다', '오늘은 세탁기 수리기사가 와서 가봐야 합니다' 이런 식이었다. 비슷한 사유를 반복해서 쓰는 게 너무 대놓고 드러난다는 것. 그렇지, 그러면 안 되지. 회사 공식 교육자료에 들어갈 만큼 술자리에 부르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의 대립은 아주 오래된 것이리라.


술자리를 피할 때는 건강문제를 드는 게 가장 만만하고도 신빙성 있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것보다도 핑계가 아닌 진심을 말할 수 있게 되어 술을 막으려는 자와 부으려는 자의 서로를 불신하는 긴장감 넘치는 눈치 싸움이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제가 요즘 건강관리 중이어서요, 술이 잘 안 받아서요, 술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내일 개인 일정이 있어서요.


오이 못 먹는 사람한테 오이 억지로 먹이는 사람은 없는데, 술 못 먹는다는 사람한테 술 억지로 먹이는 사람은 아직 많은 것 같다. 술을 거절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내가 나 스스로에게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지,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건 불편하기 마찬가지다. 그건 아마 거절이 상대방에 대한 거절이나 사회생활에 대한 거절로 확대해석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술 안 마실게요" = "저 알콜 액체를 내 몸에 들이기 싫습니다"


그냥 딱 이 정도 의미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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