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말, 말.
언어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도구다.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개인적 영역(Personal Boundary)은 몇 마디의 말로 종종 무심하게 침해받고는 한다.
"결혼은 언제 하게?"
"월급 얼마 받아?"
"부모님은 무슨 일 하시니?"
"애는 왜 안 낳아?"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면 상대방은 서둘러 덧붙인다.
"궁금하니까 그러지~"
"이게 다 관심이고 사랑이야"
이런 질문들은 사실 관계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다소 폭력적인 질문의 영역에 들어간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당신의 호기심을 내가 채워줘야 할 의무는 없으며, 그 질문이 전혀 관심과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관계중심적인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무례한 질문들은 애정과 관심으로 둔갑하여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해 왔다.
시험 점수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에게 "시험 잘 봤니?"라는 소리는 "넌 시험을 잘 봐야 해", 취준생에게 "좋은 소식 없니?"라는 말은 "빨리 취직해야 해", 결혼 적령기라고 간주되는 나잇대의 사람들에게 "요즘 만나고 있는 사람은 있니?"라는 질문은 "너 왜 연애 안 하니", 결혼을 한 부부에게 "아이는 언제 낳을 거야?"라는 말은 "당연히 아이 낳아야지"라는 말로 들린다. 당연히,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질문들이다. 스트레스의 이유를 따져보자면 대답하기 민감한 주제에 대해 대답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답이 뻔히 보이는데 나의 답이 그게 아닐 경우에 느껴지는 '내가 잘못된 건가?' 하는 의심과 불안감 등이 있겠다.
내가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선택한 반응은 침묵 혹은 얼버무림이었다. 나를 보호하고 싶다는 본능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대답이 완벽하게 준비가 될 때까지는 말을 사렸다. 모든 건 다 내 영향권 아래에 있고, 질문을 던지시는 당신은 전혀 걱정하거나 참견하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그 질문들이 나를 평가하기 위한 수많은 잣대들 중 하나라고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안전한 껍질 속으로 숨어들었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 당시에는 높게만 보였던 2학년 선배들이 종종 하던 말이 기억난다.
1학년 때는 놀아도 돼. 어차피 재수강하면 되니까, 그냥 수업 대충 째고 튀어
생소한 대학생활이라는 것을 1년씩이나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말인데 따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고, 그렇다고 학생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 건 뭔가 아직 어색해서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몇 년 후, 고학년이 된 선배들이 1학년 때 말아먹은 성적을 회복하기 위해 재수강과 초과학기의 늪에 빠진 것을 목격했다. 이때부터 나보다 어린 사람이나 후배에게 어떤 특정한 선택이나 행동이 옳다는 식으로 말하는 걸 경계하게 되었다.
연애도 마찬가지. 언젠가 한 번은 고등학교 동창 두 명이 사귄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뒤에 따라 나오는 말들이라고는 '헐, 걔네 둘이 왜 사귀어? ㅇㅇ이 아깝다' 혹은 '진짜 이상해, 안 어울려'와 같은 것들. 그러고서 앞에서는 "너네 너무 잘 어울린다~" 같은 말들에 질려버렸다. '걔 누구랑 사귄대'라는 말의 '걔'가 되기 싫어서 과 CC 같은 건 목숨 걸고 피했고, 덩달아 할 줄 아는 말이 남 얘기밖에 없는 사람들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인턴을 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컨설팅 기업 중 하나였는데 거기서 한 차장님에게 "왜 3대 컨설팅 화사 안 가고 여기 왔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너 정도 학력이면 당연히 거기를 가야지, 여기서 뭐 하고 있냐는 듯한 어투였다. 순간 '내가 이 회사를 온 게 잘못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임밸류 있고 돈 더 잘 주는 회사 가야지'라는 말과 더불어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회사는 구리니까 빨리 탈출해'라는 말이 겹쳐서 들렸다.
사회생활 속에서도 참견의 말은 방심할 때마다 툭툭 튀어나와 마음을 콕 찌른다. "만나는 사람 있나?",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인가?", "음, 그래. 아직 그 나이면 그래도 어리지" 등등. 짧은 대화 속에 결혼에 대한 재촉과 나이에 대한 초조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엄청난 화법이다. 그런 질문을 들을 때면 엉뚱한 대답을 해서 상대방을 골려주고 싶다는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는 한다.
우리가 시시때때로 마주하는 무수한 질문들과 조언들은 사실 순수한 관심이 아니라, 너는 왜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났느냐는 추궁과 더불어 '지금 이 시기에는 이게 맞아'라는 식의 무언의 압력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애정을 빙자한 참견의 역사에 반감이 들어서였을까, 내가 내리는 선택에 대해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라고 건네오는 조언 혹은 참견들은 먼저 경계부터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위한다며 하는 그 조언들이 대부분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대화인 경우가 많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는 그냥 끄덕이며 넘기게 되었다. 그 조언은 어쩌면 삶에 다양한 모습이 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와 더불어,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살고 있어'와 같은 안도감을 느끼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참견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내 인생을 대신 걱정해 주는 듯한 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미묘하게 비교하는 말, 그 나이라면 당연히 해봐야 된다는 듯 불안감을 조장하는 말 등. 잽도 계속 맞으면 쓰러질 수 있듯이 하루하루 불편한 말들이 쌓이다 보면 사람 만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예전에는 학교 동창같이 외부 요인으로 묶인 관계를 억지로 노력해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할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자극하는 관계는 전혀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나의 선택을 증명하거나 애써 설득하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확 줄었다. "왜?"라고 묻지 않고 그냥 상대방이 먼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곁에서 차분히 기다려줄 수 있는 관계. 우리가 많이 다르더라도 서로 똑같이 맞추려고 하지 않고 존중해 줄 수 있는 관계.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가깝다는 이유로 그 경계를 마구 짓밟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주는 사람들만 곁에 두고 싶다.
내가 기본 전제로 깔고 있는 것들이 상대방에겐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먼저 한다면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한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 누군가는 말 못 할 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람을 잃는 슬픔을 겪어나가고 있을 수도 있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도, 몇 년째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을 수도, 파혼을 겪었을 수도 있다. 서로의 사정은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어떤 질문은 상대방의 상처를 후벼 팔 수도 있고, 그래서 배려의 범위는 좀 더 넓어야만 한다.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화법에 따라 대답을 하고 싶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내가 잘 따르던 선배가 한 분 계셨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팀원분들이 결혼을 하신 상태였다. 그때 "요즘 연애 해요?"라는 질문에 이어 "아, 요즘 유부남 되고 나니까 싱글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더라고. 우리는 이제 뭐, 뻔하잖아. 퇴근하면 바로 집 가서 밥 차려야지. 요즘 싱글들 노는 거 들으면서 대리만족 하고 싶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내 연애사에 대해 술술 말하고 싶어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혹여 불친절한 질문공격에 정신이 얼얼한 상황을 겪었더라도, 그 사람을 반면교사로 삼으며 한 뼘 더 서로에게 친절한 배려와 관용을 보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