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taj mahal
Dec 23. 2023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단편집에
결혼 7년 만에 20평대 아파트를 장만해 이사 들어온 30대 부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집에 오시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아이는 언제 가질 거냐고 자꾸 캐묻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에 주인공의 생각이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중략)
집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중략)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단 한 한 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 대 중반, 이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 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장류진 작가,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도움의 손길' p.142-143)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요즘 30대가 느끼는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이런 식의 감성으로 표현했구나... 생각이 들면서 사실 속으로 좀 놀랐습니다.
30대 초반 직장인이 겪는 팍팍한 일상, 불안한 고용 형태와 주거 상황 하에서 아이까지 가졌을 때 추가로 져야 하는 금전적 심리적 중압감은 공감이 갑니다. 서울에 집 한 채 장만하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15년간 저축해야 한다지요. 출산을 기피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기적이라고 비난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인입니다.
회사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는 30대 초반 여직원과 며칠 전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결혼한 지 약 2년 정도 된 친구인데, 그녀가 대학 동창들을 만나,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이야기하자, 아직 미혼인 친구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고 하더군요.
"말도 안 돼! 왜 벌써 네 인생을 망치려고 그래? 너 정신이 있는 거야?"
물론 아이를 가지는 것은, 논리적으로 따져 봤을 때 전혀 이득이 안 됩니다. 20평대 아파트에 그랜드 피아노라니, 이 얼마나 아둔한 짓인가요? 도저히 각이 나오지를 않지요.
그러나 위 소설을 읽으며 아이를 '그랜드 피아노'에 비유한 것을 보고 흠칫 놀랐던 이유는, 한 아이가 엄마의 삶에 가져다주는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을 너무 쉽게 간과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 충만감은 사실 아이를 낳아서 키워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고단은 아이가 선사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으로 눈 녹듯이 치유됩니다. 아이를 키워 본 99.9%의 부모님들은 저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기성세대의 꼰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 역시 회사를 다니며 30살과 32살에 첫째와 둘째 아이를 낳았고, 그 이후로 20년 간 하루도 쉬지 않고 회사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두 아이 키우려면 맞벌이를 하면 훨씬 낫거든요. 회사와 집을 오가며 늘 시간에 쫓기면서 동동거리고 살았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계속 다녀야 하나 천만 번도 더 고민했고, 아슬아슬한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두 아이를 낳은 건 제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는 단연코 얘기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물론 희생도 따르고 힘도 들지만, 그 어떤 어려운 순간에도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해 본 적 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제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었으니까요.
이제 대학생인 두 아이,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커 온 과정이 마치 영화 <라라랜드> 마지막 장면에서의 상상 파노라마처럼 소중하게 제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없었다면요? 그 여유로움으로 해외여행 더 가고, 명품백 더 사고, 맛있는 음식 더 많이 먹으러 다녔을까요?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아이와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과 더불어 제 소울메이트인 두 아이의 든든한 존재는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거든요.
아이는 그랜드 피아노가 아닙니다. 아이는 또 다른 나 자신 이상으로 소중한 존재이며 매 순간 보석과도 같이 빛나는 이 세상 가장 가치 있는 생명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