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번역의 자격
어떤 '자격'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의사, 약사, 변호사, 회계사 등 흔히 말하는 '전문직'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직업과 다르게 왜 이들에게는 전문 자격을 요구하는 걸까? 해당 직업인들 역시 일을 배워가는 사회 초년생 시절을 거쳤겠으나, 특정 분야에서만큼은 일정 수준의 지식이 '완성형'이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가'는 어떤가? 역시 일정 수준의 완성형 지식을 갖추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문직'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전문직과 달리 특별히 공인된 자격 증명은 없다. (국가 공인 자격증을 요구하는 어느 나라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요원한 이야기다.) 그렇다 보니 영어권 국가에서 한동안 살거나 공부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통번역 분야를 시작해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는 어떤가? 영어권 국가에 살아보거나 공부한 적이 있는가? - 전혀. 20대 초반, 유럽 여행 중 영국에서의 며칠... 그마저도 세미 패키지로 다녀온 여행이 유일하다. 그럼 대학에서 어문 전공을 했는가? - 아니. 대학에서는 화학 공학을 전공했고,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어문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래도 운 좋게 그 통번역대학원 졸업장을 들고 지금까지 사회에서 1인분 역할을 해 내고 있다. 그렇다면 공학도 출신의 내가 어문으로 세탁(?)한 학벌과 몇 년 간의 통번역 경력만으로 출판 번역에 기웃거려도 되는 것일까?
일단 출판 번역을 너무 성역화하여 이야기할 생각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다만 지난 4년간(... 벌써!) 인하우스 통번역사로 일을 해 보니, 출판 번역과 인하우스 번역 간에 차이점이 분명 존재하겠구나 싶다. 우선 회사 내부 문건을 주로 다루는 인하우스 번역의 경우, 번역 결과물을 보는 사람들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 관련 문건과 직간접적인 인력들만 문서를 보기 때문이다. 또 문서와 관련된 배경지식에 한해서는 번역가인 나 보다 문서를 읽는 다른 사람들이 더 전문가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일부 전문 지식이 매끄럽지 못하게 전달되더라도 독자가 스스로 보정해서 읽는 경우가 있다. 마치 업무 태만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인하우스 번역의 경우 '날카롭고 정확한' 번역 보다 '신속한' 번역이 보다 중요하다. 전문 용어를 음차하고 영어와 병기하더라도, 관련 내용을 사람들과 공유하여 업무를 빨리 진행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의 업종 및 산업 특징에 따라 우선순위와 그 중요도는 조금 다를 수 있다.
반면 출판번역의 경우, 번역 결과물을 보는 사람들의 범위를 특정할 수 없다. 특히 나는 한영 번역과 온라인 유통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독자의 지식수준, 성장 배경, 소득 수준, 심지어 국적조차 특정할 수 없다. 그 말인즉슨, 번역을 하는 한국어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영어 문장의 적절성 모두 오롯이 나의 책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더불어 저연차 인하우스 번역사로서 가졌던 면죄부, '이제 1~2년 다녔는데, 잘 모를 수도 있지'하는 방패는 출판 번역 시장에서는 사라진다. 나부터도 마음에 들지 않는 번역 도서를 볼 때면 '번역가 왜 이래?' 하는 생각을 하고 말지 '아직 경력이 많지 않으니 잘 못 할 수도 있지'하는 아량 따위는 갖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출판 번역의 경우엔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번역을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겠다.
나에게 인하우스 통번역에서 출판 번역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전문성은 부족해도 신속한 번역'에서 '빠르진 않더라도 정확한 번역'으로 전환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나는 원문을 정확히 이해해서 그 뉘앙스를 담은 영어 문장을 써 내려갈 역량을 갖추었는가? 이쯤 되면 호기롭게 '그렇다'란 대답을 해야 하겠으나, 솔직한 내 마음은 '아리송'에 가깝다.
글을 빨리 읽고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일은 잘 해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출판번역의 특징상 더욱 필요한 자질은 글자 너머의 의도를 읽고, 그 의도를 영어로 재구성하는 역량이다. 모두 단시간에 키우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작가의 의도가 다층적이지 않고 명확한 글감을 골라 첫 단계를 비교적 수월하게 넘어가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는 지름길도 쉬운 길도 없으며, 오롯이 나의 능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사실 매일같이 영어를 읽고 쓰는 게 직업이면서도,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을 위해 영어로 책을 쓰는 일에 쉬이 자신 있다고 말하지는 못하는 게 문제다. '영어가 모국어도 아닌 내가 영어로 쓴 글을 팔아도 될까?' 하는 물음. 누군가가 나타나 답을 정해 줄수도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저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간 스스로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결국 실력이 의심스럽다면 실력을 키워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난 '내 실력'과 '내 자격'에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나의 답은 아침마다 EBS 어학 교재를 펴는 것으로 정했다. (되게 광고 같은 타이밍이지만, 결코 광고는 아니다...ㅋㅋ) 아침 6시부터 7시까지 방송하는 프로그램 3개의 교재를 사서 매일 청취하고 틈틈이 복습까지 하는 루틴을 세웠다. 집에서 일상 생활하는 시간에도 EBS 어학 방송을 계속 틀어 놓는 것. 그게 내가 시도해 볼 수 있는, 내 자격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길이겠다. 이렇게 8월부터 시작하였고, 한동안은 이 공부 방식을 지속해 나갈 생각이다. 문장의 뉘앙스나 새로운 표현을 익히는 데 게을렀던 지난 시간을 반성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공부가 번역가의 자격을 유지시켜 준다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출판 번역가'의 자격은 공부를 계속하는 그 자체라고 믿는다. 우선은 내가 쓴 영어 문장에 오해는 없을지, 의도는 잘 담겼는지 검토하고 살필기 위한 실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인 원어민에게 최종 검수를 맡기겠으나, 원문의 퀄리티를 높여 주는 것이 검수자의 역할은 아니지 않은가. 또 공부를 꾸준히 해야 동시대의 말을 놓치지 않고 익힐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번역가의 전문성이 다른 전문직과는 다른 부분이 아닐까. 정해진 '로직'이 존재하는 의사, 변호사, 판사와 달리, 말과 글은 세대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너무나 쉽게 바뀌기 때문에 지속적인 공부 없이는 나의 전문성이 곧 시간에 바랜다는 점 말이다.
하하... 10대 20대 때의 공부만으로 평생 밥 벌어먹고 살기에는 글렀구나 싶은 아쉬운 결론이지만, 그래도 부족한 공부를 채워가면 출판 번역에 도전하지 못할 이유는 없겠다는, 나도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슬며시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