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의 우선순위와 아이의 적응
내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치료는 무엇일까?
그 무렵 나는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치료는 가급적 다 받게 하였고, 아이는 어렸기 때문에 그저 울면서 수업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올바르게 접근한 것도 아니었다.
우선, 아이의 발달단계에 맞는 수업을 선택했어야 했다. 우선, 아이의 몸 움직임이 아둔하고 소근육도 발달이 많이 더뎠기 때문에 특수 체육 수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는 수업 중에 너무 많이 울었다. 들어가기 전부터 울어서 나와서까지 울었다. 왜 우는 걸까... 주변 사람들은 그저 버텨내야 한다고만 말을 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만 알고 저린 마음을 숨기며 아이를 지켜보고 기다렸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가 수업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졌어야 했다. 하기 싫어서, 힘들어서, 낯설어서 우는 것이라면 이것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버티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주변 소리가 힘들어서, 조명이 너무 눈부셔서 공기가 탁해서 숨이 안 쉬어지는 느낌이라서 우는 거라면 환경을 바꿔줘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모든 감각이 예민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자극이 다 힘들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더욱 힘든 것부터 제거해 주는 방식으로 도와주었어야 하는데, 그것을 참 늦게 깨달았다. 결국 특수체육 치료실을 바꾸었는데, 아이 특성을 감안하여 몇 가지 고려를 하였다. 첫째, 지하실에 위치한 시설이 아닐 것(공기의 질이 다름). 둘째, 바닥에 운동화가 미끄러질 때 혹은 뛸 때 소리가 지나치게 나거나 울리지 않을 것(소리가 무서워서 귀를 막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함). 셋째, 창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는 등의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것. 넷째, 조명이 바닥이나 창에 반사되어 눈부심을 유발하지 않을 것(눈이 부시면 고개를 숙이고 전면을 쳐다보지 않음). 몇 군데를 방문하고 아이가 그 안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본 후 치료실을 바꾸었는데, 아이는 그 이후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습득하고 발전하였다.
그리고 나는 아이가 만 3세가 지나도 말을 하지 않아 언어치료를 시작하려고 알아보았다. 하지만, 대체로 거절당했다. 대체로 거절당했다는 것은, 솔직한 치료사는 수업이 어렵다고 했고 솔직하지 않은 치료사는 효과는 자신할 수 없지만 수업을 해볼 수는 있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거절의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 엄청난 소통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아이가 치료사에게 눈길을 한번 주거나 어떠한 장난감에 관심만 보여도 그것을 시작점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는데 우리 아이는 그것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몇 군데 문의해 보아도 대답은 비슷했다.
나는 다시 찾아보았다. 언어 치료사는 그저 수업이 힘들 것이라고만 이야기할 뿐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답은 의외의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이 치료실에서 알게 된 다른 엄마가 감각통합 치료를 권해주었다. 그 엄마의 말은 그저 단순히 '어릴수록, 그리고 자폐 성향이 짙을수록 필요하대'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때까지 감각통합 수업이 우리 아이에게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각통합 치료사와 상담을 한 후 언어 치료에 앞서 이 수업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섰다. 아이가 소통을 하지 못하는 문제가 감각적인 어려움에 기반한 것이면 그것을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자기 몸을 자기 의지대로 사용할 수 없으면 목소리를 내는 것이나 사용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도 했다. 왜 이런 내용을 진단받은 병원에서도, 심지어 언어 치료실에서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역시 내가 직접 더 알아보고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나는 보통 아이들과 비교해 가면서 아이가 스스로 찾지 않는 활동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주변의 아이들을 보면, 눈뜨면 나가자고 하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열중하곤 하였다. 우리 아이에겐 그런 동기나 욕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인위적으로라도 아이에게, 아이의 감각에게, 아이의 뇌에게 새로운 자극, 변화된 자극, 그리고 끊임없이 변주하는 세상을 겪게 해주는 것이 조금이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아이와 함께 야외로 나가 둘레길을 걷거나 수목원을 찾아가기도 하고, 동물원이나 식물원을 다니며 끊임없이 자연환경에 노출했다. 자연환경의 좋은 점은, 아무런 노력 없이 꾸준히 가기만 해도 스스로 변하며 매번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는 점이었다. 보여줄 것도 설명할 것도 매번 달라졌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계속 알아낼 수 있었다. 우리가 매일 같은 곳에 가더라도 자연은 알아서 변하고 있었고, 새로운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주말 행선지는 사실상 아빠의 몫이었고, 주중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집 근처 놀이터를 주로 데려가곤 했는데, 감각통합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놀이터도 집 밖에 있었으므로, 같은 놀이터를 가더라도 어제의 그 놀이터가 아니었다. 노는 아이들이 달라지거나, 새로운 쓰레기가 버려져 있기도 했고, 보이지 않던 새가 와서 지저귀기도 하였다. 물론, 아이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지만 경험하게 하는 것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으리라 생각하며 데리고 다니곤 했다.
어제와 다른 무언가를 알려주거나 함께 바라볼 것들이 집 밖에는 언제가 가득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나의 이 생각은 훗날 코로나를 겪으면서 믿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