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인 외출의 시작
많은 경우 그러하듯, 나 역시 운전을 하여 아이를 차에 태우고 돌아다녔다. 기관이나 치료실이 도보 거리에 있지도 않을뿐더러, 아이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평범하지 않은 아이와 지칠 대로 지쳐 보이는 엄마가 조용히 힐끔거리는 시선을 외면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자극이 가득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었다. 그나마 내가 운전을 즐기지 않아서 꼭 필요한 곳만 운전을 하고 가급적 걸어 다니기는 했지만, 운전하여 돌아다니는 빈도나 거리가 적을 뿐 아이는 차에 몸을 싣고 앉아있기만 하면 저절로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서로를 위해, 이것이 가장 스트레스가 적고 빠른 이동 방법이었다.
그날도 나는 아이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집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 있었다. 좀 쉬어가는 마음으로 골라든 것이었는데 아이를 성인기까지 키운 미국의 부모님이 쓰신 수기 성격의 책이었다. 그 책에서 다루어진 치료의 시작은 식단 관리였고, 우리나라와 시스템이 달라 잘 이해하지 못한 갖가지 치료 시스템을 이용하는 방법들이 추가되어 있었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집에서 아이를 양육한 원칙이나 요령 같은 것들을 정리한 책이었다. 여기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내용은 '아이가 성인이 되면 혼자 운전을 하고 독립하여 지낼 수 있을 것인가. 운전을 하지 못한다고 하여 독립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였다. 그곳은 우리나라보다는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고, 운전을 하여 이동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결국 미국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려면 운전을 하는 것이 당연한 전제처럼 여겨지는 문화여서 그런 화두가 다루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비단 미국만의 일일까?
혼자 살아간다고 전제하였을 때, 음식을 사 먹으려면 식당에 가야 하고, 해 먹으려면 마트에 가야 한다. 아프면 약국을 가야 하고, 진료가 필요하면 병원을 가야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택시를 타거나 버스 혹은 지하철을 이용하여야 한다. 그게 아니면 운전을 해야 한다. 운전은 운전면허 시험을 통과해야 가능하다.
여기서 잠시 생각을 해보자. 나는 운전면허를 한 번에 따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운전을 즐기지 못한다. 공간감각이 부족하고, 길눈이 어두우며 차도 위의 차들이 나보다 너무 빠르게 움직인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매우 많이 받으며 운전한다. 그럼 아이는 커서 과연 운전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필기시험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글을 깨우칠 수 있을까? 컴퓨터 사인펜으로 마킹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지정된 시간 동안 지정된 자리에 앉아서 시험을 볼 수 있을까? 했다고 치자. 면허를 땄다고 치자. 사고가 나면, 그것을 처리할 수 있을까? 길에서 운전하다 혹여라도 싸움이 붙으면 대처를 할 수 있을까?
답은 너무 쉽게 나왔다. 버스와 지하철 타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나랑 제법 걸어 다니기 시작했으니 이제 슬슬 대중교통에 도전할 때가 된 것이다.
걷기는 모든 것의 기본이었다. 체력의 기본, 감각통합의 기본, 대근육의 기본... 심지어 옆 사람과 보조를 맞추어 걷는 것은 소통의 기본이었다.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함께 걷는 활동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고 가늠하고 예측할 수 있었다. 감각이 얼마나 안정되어 가는지, 주변 환경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 대근육이나 소근육은 얼마나 발달되었는지, 체력은 많이 좋아졌는지 등등... 그 무렵 기관을 갈 때에는 내가 차에 태워서 가고, 집에 올 때에는 놀이터와 구멍가게를 거쳐 집으로 슬슬 걸어오는 패턴으로 지내고 있었다. 이것을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것으로 변경해 보기로 했다.
날 좋고, 기분 좋은 그런 날 우리는 버스를 탔다. 기관에서 현장학습 갈 때마다 버스를 타서 그런지, 타야 한다고 말하는 차량을 줄 서서 잘 탔다. 하지만 버스카드 찍는 건 손을 잡고 해 주어도 몸이 먼저 좌석 쪽으로 이미 쏠려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안 해봤으니 그렇겠지. 다행히 빈자리가 있어서 얼른 앉으라 하고 그 앞에 내가 안전벨트처럼 막아서서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시작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빈자리가 없거나, 사람이 너무 많거나, 누가 재채기만 해도 아이는 짜증을 내거나 울었다. 달래어도 달래 지지 않아서 식은땀을 흘리며, 우리들을 지켜보는 갖가지 시선들을 향해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시그널이라도 되는 양 더 열심히 아이 앞에서 떠들어대며 겨우 집에 도착하는 날들이 있었다.
달래 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감각이나 인지적인 문제로 인해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내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이었으리라. 감각통합과 특수체육으로 메꿀 수 있는 것은 메꾸는 중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상호작용. 그리고 소통 능력. 그렇다. 나는 늘 짝사랑 같은 그 묘한 느낌에 애를 태우며 지내고 있었다. 정해진 상황에서 정해진 루틴으로 움직이고 반응하는 것은 잘 되었지만, 돌발 상황에 대한 적응이 아직 많이 힘들었다. 주변을 이해하고 생각하여 반응하지 않고 머리에 새겨진 방식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말을 아직 못 하는데, 상호작용과 소통능력은 어떻게 올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