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인 딸은 라면을 먹을 때 봉지에 써져 있는 대로 물을 넣으면 짜증을 낸다. 너무 싱겁다고 한다. 간혹 내가 라면봉지에 써져 있는 레시피를 따라서 정석(?)으로 정성껏(?) 끓여서 주어도 여지없이 불호령을 내린다. 아무리 ‘파’도넣고, ‘계란’도 풀어넣고, 면이 붇지 않도록 시간을 조절해 주어도 소용이 없다. 오늘이 그랬다. 사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애들에겐 모든 엄마들이 ‘눈치’를 본다. 행여나 기분이라도 상해서 공부에 방해가 되었다는 얘기라도 들을까 봐, 나름 온갖 보이지 않는 애를 쓴다. ‘라면 대령’하라면 라면을 대령해야 한다. 그런데, 하필 오늘 라면 국물의 '나트륨 함량’에서 시험기간인 딸아이 심기를 건드려버렸다. '즐거움이 먹을 것밖에 없는데 왜 물을 많이 넣었느냐'라며 짜증이 난다고 얘기한다. 딸이 라면을 결국 다 먹지 않고 독서실로 가버렸다. 옆에 있던 대학생인 아들이 한술 더 뜬다. ‘아마 내가 고등학생 때, 지금처럼 민감한 시험기간이었다면 나도 짜증 날 수 있었을 거야’라며, ‘일종의 시위지~’라고 한다. 그저 나는 ‘엄마인 게 항상 죄인 사람이다~’ 라며 위안한다.
사실, 나는 라면은 국물맛으로 먹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무파마’를 좋아하는데, 우리 딸은 ‘삼양라면’을 좋아한다. 라면의 종류, 끓이는 물의 양, 계란을 넣고 안 넣고… 이 모두가 ‘개인의 취향’이다. 누군가는 수험생은 라면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할터이고, 어떻게 집밥을 먹여야지 얘한테 ‘라면’이나 끌려주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말이 무의미해지는 때는 아이가 ‘엄마 오늘은 라면 끓여줘”라고 말할 때이다. 한편, 어떤 사람은 별것도 아닌 것에 뭘 그리 신경 쓰냐는 사람도 있다. 어떤 엄마는 같이 짜증 내면서, ‘공부하는 것이 대수니? 라며 도리어 아이에게 짜증을 낼 수도 있다. 어디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만, 매 끼니를 ‘라면’을 먹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당연히 시험기간인 아이의 요구에 따라 ‘고급(?) 취향’에 적극 호응해 준다. 많은 엄마들은 작은 것에서라도 아이가 공부하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공유해 주려고 노력한다. 반면, ‘공부는 지가 하는 거죠'라는 정반대의 ‘방임형’도 있다. 아이러니한 것을 똑같은 엄마의 mothering이더라도 자녀의 성향과 지역적 특징, 그 해의 입시제도의 변화등 다양한 변수에 따라서 mothering의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점은 아무리 변수가 다양하다 하더라도, 각자의 mothering에는 나름의 공통분모인 ‘취향’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아비투스’ (Habitus)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어떠한 결정을 내리며 다양한 사회적 행동을 수행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을 ‘Habitus’(아비투스)라고 한다. 아비투스 ([프랑스어] habitus)는 ‘제2의 본성’과 같은 것으로, 친숙한 사회 집단의 습성 따위를 뜻하는 말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Bourdieu)가 규정한 용어이다. 'Habitus’는 일반적으로 개인이 사회화와 삶의 경험을 통해 습득하는 뿌리 깊은 습관, 기술, 성향 및 취향을 말한다. 부르디외(Bourdieu)는 "문화 자본"의 개념을 도입해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사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보이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지만, 여전히 “사회적 계급, 계층”의 존재함을 연구결과가 증명한다.) 각기 다른 계층의 문화적 가치와 관행을 전달하는 방법과, 이러한 요소가 사회적 계층화와 불평등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Habitus’(아비투스)는 유용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what to do’(무엇을 할까?)를 결정하게 하는 기준과 당연히 여기는 행동을 하는 ‘why?’를 결정하는 것이 ‘Habitus’(아비투스)이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