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Mothering - 3

by 서혜진 Jean Seo

자녀와의 '관계성'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들의 주된 변명 아닌 진단법(?)이 "사춘기라서 그런다"이다. 사실, 현장에서 만나는 자녀와의 관계성 문제의 대부분은 꼭 그럴 수 있는 인과관계가 아닌 경우도 많다. '사춘기여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한국의 중학교 2~3학년의 아이들의 엄마와의 갈등은 학업적인 부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렇다고 한국처럼 mothering의 시작과 끝이 온통 "교육"인 이렇게 학벌과 자녀의 성적에 진심인 나라에서 어떻게 자녀에게 '공부'얘기를 안 하고 살 수 있나? 아무리 '사교육'없이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말을 수없이 연구논문을 증거로 보여주고, '사교육 없이 성공한 엄마'들의 생생한 간증(?)들을 마르고 닳도록 들어도 모두 '남의 집'얘기다. 어떻게든 이 시기가 잘 지나가기를 오늘도 우리 한국의 엄마들은 하루하루를 잘 넘겨가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위. '당근과 채찍'을 잘 사용하는 '전략적 엄마들'의 '생생한 간증'들은 엄마들 모임에만 나가도 쉽사리 들을 수 있다. 비록 내가 따라 하기는 쉽지 않다는 그 찹찹한 기분 때문에 오늘도 엄마인 우리들은 괜스레 '대치동'맘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부터 '유튜브'에 있는 전설적인 엄마들의 교육법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교육법'이라 하더라도 '그분들'의 '협조'없이는 성과를 낼 수 없는데, '이분들'이 오늘도 말도 없이 '학원'을 빠졌다는 얘기를 듣거나, 시험이 내일모레인데도 '오늘은 친구랑 조금만 놀고(?) 오시겠다'라고 한다(사실, 어제도 말없이 늦게 와서 말다툼을 했는데.. 그다지 염두에 두지도 않는구나라는 무기력감이 든다)'. 그나마 이 정도는 괜찮다. 이번 시험을 잘 볼 테니, 아이패드를 사달라는 '협박'과 '거래'를 또 시작한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할 터이니 뭐뭐를 해달라는 아이들의 '민원'은 참 창의적이기도 하다. 이 모든 상황은 조금의 detail이 다를 뿐, 엄마의 일상처럼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다. 엄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때로는 자녀의 부주의함으로 생기는 사소한 일들, 특히 엄마가 상황을 조절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래서 결국 '분노'하게 만드는 '사건'들을 대할 때 그 어느 '우아한' 엄마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어느 때는 사랑을 꾸며 내는 '주작'이 훨씬 할만하다고 생각되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와의 ‘친밀감’을 유지하고 싶은 엄마는 분노 또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신중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엄마의 감정이 ‘mothering practice’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자녀가 훈육을 엄마의 분노라고 느끼지 않도록 엄마의 감정의 높낮이의 표현에 전략적인 것이 필요해 보이는 지점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자녀가 사춘기에 들어선 이후에 더욱 필요한 것들이긴 하다.) 어떻게 가능해질까? '야누스'의 두 얼굴이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기 위함이라는 긍정적 의미의 은유적 해석은 현명한 엄마의 mothering의 특성을 가진다. 엄마 스스로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ex. 아이와의 갈등상황, 당면한 문제에서 해결방안이 나로부터는 생길 수 없다고 느껴질 때)와 거리를 두고, 엄마 자신의 ‘과거’(나의 사춘기 시절, 또는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해서 힘들었었던 때, 그냥 나 자신에게 무기력해졌었던 때 등)와 ‘미래’(ex. 자녀가 성인이 된 후, 10년 뒤의 내 삶 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숨 호흡을 두세 번 크게 하고, '거울'을 보자. (이왕이면, 정말 화가 날 때는 화장한 모습으로 보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혼잣말로 얘기해 보자.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결국,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mothering”의 출발점이다. 객관적으로 나와 자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치 엄마인 내가 아이 앞에서 '전지전능한 신'인 듯한, '야누스'가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던 '수호신'의 역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스스로의 '역할론'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조망하려는 노력이 엄마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기 위함이라고”. 엄마와 자녀는 모두 어디서든 언제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기준을 잘 정할 수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고, 스스로의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엄마의 모든 mothering의 구체적인 행동의 기저에도 각자의 '교육/양육 철학'이 있다. 사실, 기업에도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를 먼저 세우고 구체적인 전술들을 만들듯이, 한 생명을 빛으로 자라게 돕는 엄마에게 교육 철학과 양육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편, 감정적인 엄마는 아무리 좋은 철학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실행해 낼 수가 없다. 비록, 그 이유가 '그분들'이 제공한 것일지라도, 우왕좌왕하는 엄마의 일관성 없는 모습은 자녀에게 삶의 기준의 ‘모호성’만을 학습시킬 뿐이다. “감정적”이 아닌, “감성적”인 엄마가 되고자 노력해 보자. 이를 위해서는 엄마가 먼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 후에야 자녀에게 ‘감정'을 쏟아내지 않을 수 있다. 잠깐 내려놓고,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자녀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이 보일 것이다. 자녀에겐 엄마가 ‘야누스’다. 나의 자녀가 엄마인 나를 어떤 '야누스'로 규정할지는 오늘 나의 감정표현에서 결정되리라.



사진: Unsplash의 micheile hend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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