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양육하는 엄마의 역할을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로마의 출입구와 전환의 신 '야누스'의 특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비유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엄마’가 직면한 도전과 책임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엄마는 종종 여러 역할과 책임을 저글링 하는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 이러한 역할 간에 원활하게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엄마의 역할과 로마신화의 양면을 지닌 '야누스'의 특성을 비유한 것은 mothering의 다각적인 성격을 부각한 것이다. '야누스'처럼 엄마도 자녀의 삶의 여러 측면을 동시에 인식하고 다루면서 보호, 지도, 균형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야누스'는 집이나 도시 출입구 등 주로 '문'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문'은 '시작'을 나타내며, 모든 사물과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물론, 나는 크리스천이라 이런 '신'들의 이야기에 그다지 진심은 아니다). 아마도 너무나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신'으로 숭배했었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서 인식되는 '야누스'는 앞면과 뒷면이 다른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이중성의 부정적 의미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된다. 마치, '모성애'의 숭고했던 이미지가, '출산'과 '여성의 삶의 굴레'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어버린 현실과 묘한 일치를 보이는 것에 씁쓸함마저 느껴진다.
내 자녀에게 엄마인 나는 어느 모습의 '야누스'로 인식되는지의 갈림길은 생각보다 엄마의 순간적인 감정표현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자녀에게 표현된 감정적인 반응 중에 가장 파괴적인 것은 ‘분노’이다. 그중, 자녀의 ‘성적’과 관련한 분노의 표현은 단 한두 번 만으로도 엄마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하는 결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진다. 엄마가 억울한 지점은 원인의 제공자인 '그분들'이 오히려 더 '당당'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분노'가 생긴다. 사실, 자녀의 안녕과 성공을 위해 정보와 이성, 감성에 입각한 결정을 내리려면 상황의 다양한 면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엄마의 '분노'의 감정은 이성을 흐리게 한다. 상황을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어떤 정도의 통제력으로든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대응을 준비하고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들어선 자녀와의 갈등상황은 모든 엄마들이 한, 두 번은 반드시 경험하는 것이다. 전 인격적으로 엄마를 향한 ‘거부’를 표현하는 자녀를 대할 때면,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것은 참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 상담을 하다 보면, '불과 1년 전만 해도 엄마옆에 와서 같이 자겠다고까지 하던 아들이 이젠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 말도 시키지 말라고 한다'는 엄마들의 속 타는 푸념을 많이 듣게 된다. 내용은 다르지만 일견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들이다. '내 아이가 이럴 줄 몰랐다'는 이야기는 단골손님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