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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브르박 Jul 21. 2020

[토목&하천이야기]토목과 건축 vol.2

토목과 건축의 결별

만능인의 시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토목과 건축이 분화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토목과 건축은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어 발전해 왔다. 지구 위로 사람이라는 종이 출현하고 대지에 뿌리내리며 살아가기 시작하면서이 기술은 시작되었다. 땅을 파고 움집을 만들고,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물의 공급이 필요하여 수로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배출하게 되는 오수 등 배수처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사람과 물류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서는 도로가 필연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방어를 위한 성벽과 요새가 필요하게 되면서 축성기술까지 발전하게 되었고, 신앙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건축양식을 표현하기 위한 기술들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시설물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바로 건설기술이다.      


  이러한 건설 기술을 수행했던 사람들이 현대에 와서 기술자 즉 엔지니어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그 건축물의 형태를 표현하는 사람을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고대부터 중세 이후까지 건설 기술자들은 현대적 의미의 기술자 및 건축가와는 차이가 있다. 고대에서부터 근대이전까지의 건설 기술자들은 모두 기술자이자 예술가였다. 심지어 철학자 발명가 등으로 활동한 경우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들 수 있는 인물이 중세시대의 불세출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화가, 조각가, 발명가로 활동하였던 그는 갑문을 설계하는 등의 토목기술자로서의 모습도 보여줬다. 즉, 당시에는 이런 만능인이 혁신을 주도하고, 기술을 선도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아피아 가도, 로마 대수로, 파르테논 신전, 콜로세움 등 당시의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시설들이 이러한 기술자들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의 유학자이자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 ~ 1836)이 있다. 정약용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가 수원화성의 건설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군사시설로서의 목적뿐만 아니라 방화수류정 등 경관성을 갖춘 모습을 보여주며 토목시설이자 상징성을 지닌 건축물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건설을 책임졌던 다산 정약용은 세밀한 공사계획서를 작성하여 후대에 유실된 화성의 복원에 도움을 줬으며, 축성 당시 시공의 편의성을 위하여 도르래를 이용한 기중기를 발명하는 등 공학자이자 기술자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수원 화성, 출처 : 수원문화재단

  고대 및 중세의 기술자 및 예술가들이 이렇듯 하나의 시설물 시공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이나 책임을 막중하였는데, 이들과 현재의 토목기술자나 건축가와 다른 점은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여 설계 및 시공을 하였다는 점이다. 유럽의 고대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볼트구조는 현대에서 설계한다면 하중의 분산과 재료의 한계 하중을 고려하여 설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하중의 응력 및 재료의 한계상태를 측정할 방법이 없던 시기로 이러한 설계가 기술자의 숱한 경험과 직감으로 이루어졌다. 조합이나 길드에서 축척된 건설 경험들이 누적되어 이러한 일들이 가능토록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건축가들이 모두 예술가이자 기술자였던 것은 이런 필연적 이유에 연유하고 있다.      



토목과 건축의 결별


  하지만 산업혁명이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산업혁명은 사회에 하나의 분기점을 만들었는데, 바로 전문화다. 산업화 이후 효율성이 증대되면서 각 분야 및 학문에서 예전과 같은 만능인이 아닌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고대사회라고 해서 역학 및 수학이 발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라드와 같은 천재들에 의하여 고대의 역학과 기하학은 놀라울 정도로 발달해 있었지만, 이러한 순수과학이 기술적인 실용 부분에서 적용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고대의 기하학은 건축물의 설치를 위한 측량과 형태를 위한 디잔인에서 적용되어 왔으나, 시설물의 내부, 즉 구조적인 역학 부분에서는 반영되지 못하고 있었다.      


  유현준 작가가 쓴 <공간이 만든 공간>에 따르면 18세기 이전의 고대부터 중세의 서양 건축가들이 수학적 계산 이용했다는 내용은 나온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는 유클리드에 의하여 기하학이 탄생하고, 예술의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수학은 종교와 어울려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서양의 문화적 기조와 융화되어 종교를 위한 건축물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황금비율이나 상징성을 숫자로 풀어 건축에 담기 시작하였다. 서양 건축물의 경우 좌우 대칭 및 정확한 비례를 확인 할 수 있는데, 이는 그런 문화적 기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런 수학적 계산이 구조적 검토나, 재료의 거동을 향한 것이 아니라, 형태의 추구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르테논신전의 기하학적 특성

  18세기 이후 전문화된 자연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재료의 발명은 기술영역에서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는데, 건설 재료의 거동 및 역학에 눈을 뜬 기술자들이 해당 분야에 역학을 접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세기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안전진단은 건설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예술가와 기존의 기술자에게 작별을 고하는 사건이 되었다. 강재와 포틀란트 시멘트의 발명은 건축재료로서 건축분야에 새로운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지만, 반면에 기존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더 이상 기존과 같은 설계를 진행 할 수 없는 역학적 영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건축을 담당하고 있던 기존의 만능인들은 건설업에 침투해오는 자연과학에 반발하였지만, 사실적 기초, 효율적인 구조 계산 등. 시대의 흐름을 부정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설기술에 두 가지 분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형태를 다루는 건축학과 시설물의 역학적 설계를 위한 토목공학이다.     

 

  역학적 계산에 입각한 시설물의 안정을 토목 기술자에게 양도해버린 건축가들은 시설물의 형태를 다루게 되었다. 음악이 시간적 예술을 다루고, 미술과 조형이 공간에 대한 예술이라면 건축은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예술의 영역이 되었다. 건축가가 의도한 동선을 거치면서 공간이 변하게 되고, 이동으로 인한 시간의 변화에 따라 공간이 사람에게 주는 공간적 의미가 변화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창고와 교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창고는 단순히 물건을 적재한다는 하나의 목적에 충실하다. 하지만 교회는 입구에서부터 규모에 감탄하며,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서 그 속에서 건축가가 의도한 공간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세계의 유명 건축가들이 건축가의 심미학적 의도가 반영되지 않으면 건물, 반영되었다면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다음편 : 제너럴리스트로서의 토목기술자와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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