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모텔에서 2만보 찍힌 걸음 수를 보고 있으니 20대 무전여행이 생각난다. 저렴한 금액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뒤척이며 잠을 청하고 지도에 의존해 걸었던 골목길들...
결혼 10년 차 남편 없이 두 번째 국내 여행을 떠났다.
수원으로 떠난 3박 4일, 술김에 예약한 호텔(이 아니다. 모텔이 확실하다.)은 금방이라도 부서질듯한 문과 닦을수록 더러워지는 바닥, 앞 객실 문이 열릴 때마다 내 객실 문도 같이 흔들리는 다소 위험한 장소였다. 취기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내 실수도 있지만 상업 후기에 완전 낚였다.
첫날밤 다이소에서 급히 산 소독 티슈로 방청소하며 슬픔에 잠겼다. 무서워. 계속 쿵쿵거리며 움직이는 문에 신경이 곤두선채 서둘러 정리하고 씻었다. 씻고 누우니 더 울적해진다. 내일 아침 멀쩡히 눈 뜰 수 있을까? 조금 더 꼼꼼하게 찾아볼 걸, 섣부르게 결정하지 말 걸. 불안한 마음을 없애고자 숙소 오기 전 뮤직바에서 들었던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밤새 뒤척이다 해 뜨자마자 나왔다. 전 날 숙소 컨디션에 놀라 저녁을 건너뛰었더니 배고픔에 쓰러질 것 같다.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 에너지바 섭취 후 영양제까지 챙겨 먹은 뒤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 서둘러 출근하는 직장인과 자식들 배웅하는 엄마, 여행 후 떠나는 가족 등 사람 냄새나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전 9시. 이른 아침부터 30도 넘는 폭염이지만 기분 전환하려 행궁동까지 걷기 시작했다. 10시 30분. 더 이상은 걷기 힘들어 쉴 곳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이럴 수가, 대부분 가게와 카페가 12시에 연다. 그 흔한 스벅과 편의점도 안 보이고 더위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발견한 도서관. 서둘러 들어갔다. 물도 마시고 땀도 식히다 책 구경하며 오전을 보냈다.
도서관에서 더위 식힌 뒤 오후엔 저장해 둔 맛집과 카페 투어하며 혼자 시간 보냈다. 돌아갈 숙소가 걱정되지만 오늘 밤부터는 일행이 있다. (다행이다!) 좋았던 뮤직바 재방문을 끝으로 둘째 날 여행을 마쳤다. 숙소로 돌아와 일행에게 숙소 에피소드를 말하며 잠들었다.
셋째 날 아침, 지인에게 좋았던 도서관을 소개하고 예약해 둔 식당에서 점심 식사 후 본격적으로 행궁동 투어를 했다. 추천받은 독립서점과 저장해 둔 카페 방문하며 시간 보낼 무렵 익명의 편지를 받았다.
우연히 들어간 소품샵에서 판매 중인 편지 서비스. 4가지 주제 중 한 개를 선택해 A에게 편지 쓰면 앞서 쓴 A들의 편지 중 하나를 받을 수 있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A에게 받은 편지를 읽자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 만개한 겹벚꽃 사진 뒤 작고 둥근 글씨로 쓴 편지는 '장마철 방문해 아쉽지만 이 또한 낭만이라 생각해'란 내용이었다. 한 번 읽긴 아쉬워 두세 번 읽어 내려가니 편지 내용과 다르게 '고생했어, 쉬어도 돼. 앞으로 잘될 거야'로 읽혔다.
바쁘게 지낸 상반기를 보상받고 싶어 떠난 여행. 고생은 남편도 했는데 혼자 와도 되는지 욕심부리는 게 아닐까 마음이 불편했는데, 익명의 편지에 크게 위로받았다.
좋아하는 책 [제철 행복]에 '행복해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틈틈이, 미리 시간을 비워두며 행복을 즐겨야 한다'는 문장이 있다. 당시 읽을 땐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여름휴가를 보낸 지금 이제야 이해된다.
일 욕심에 걷거나 쉬기보단 뛰는 편인데, 이번 여행을 통해 즐기는 법을 배웠다. 한때 유행한 굳이 Day처럼 행복을 위해 굳이, 미리 시간 내 나를 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