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만나는 운영자들을 위한 비법서: 챕터 1. 첫방문편
스토리스튜디오 혜화랩(Story Studio, 이하 '스스')은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듣고 만드는 일이 궁금한 12-19세 청소년들을 위한 열린 작업실입니다. 누구든지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발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획하고 만들어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청소년을 만나는 운영자들을 위한 비법서>는 만 매니저가 스토리스튜디오의 운영자로 일하며 발견하거나 깨달은 여러 팁과 가이드를 함께 나누기 위해 쓴 글입니다. 청소년 공간의 운영자뿐만 아니라 청소년이 궁금한 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더 좋은 비법은 언제나 댓글에 편하게 남겨주세요 :)
"농구선수 같았어요. 키가 컸어요.", "전봇대 하나가 서 있는 거 같았어요."
지난달 <스스러 언박싱>에서 스스러 윤솔, 지민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터뷰 중간에 스스에 대한 첫인상을 물어보았는데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저에 대한 첫인상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제 몸뚱이로 살아와서 그런지 187cm, 85kg인 제 자신의 거대함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아이들 입장에서는 전봇대 하나가 서 있는 거 같이 느껴졌나 봅니다. 처음 스스에 놀러 오는 아이들은 낯선 어른, 그것도 엄청나게 큰 어른이 입구에 떡하니 서서 체온도 재고 체크인 안내부터 하나하나 챙기는데 얼마나 어색하고 긴장될까요?
얼마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인근 초등학교를 다니는 5학년 여자 아이들 4명이 스스에 처음 놀러 왔습니다. 복도에서부터 아이들은 '와 신난다' 소리를 질렀는데 들어오자마자 저와 공간을 딱 둘러보고는 일순 긴장한 티가 역력했습니다. 잔뜩 긴장한 아이들은 정말 멀찌감치 떨어져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까이 오라는 말에도 꿈쩍을 하지 않더라고요.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료바 앞에서 두리번거리길래 가까이 다가가서 "깡지님, 도와드릴까요?"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가 확 좁아지는 게 아닙니까. 놀라게 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그만큼 긴장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죠.
나중에 물어보니 스스가 재밌고 놀기 좋다는 식으로 단순한 정보만 듣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첫인상이 평소 다니는 익숙한 공간과 달라 '어라'했나 봅니다. 사실 스스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동선이나 아파트 단지 주변도 아닌 대학로 한복판에 있습니다. 스스 내부는 붉은 벽돌과 갈색 가구들이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아이들이 평소에 익숙한 공간과는 차이가 있죠. 낯선 어른, 낯선 공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처음 스스를 방문했을 때 쉽게 공간에 적응하고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낯선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을 방문한다는 것과 비슷한 경험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여행이 떠올랐습니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면 모든 곳이 낯설고, 말 조차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놓인다는 것은 자연스레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런 여행 가운데 우리가 마음 편히 안식과 쉼을 누리는 곳도 있습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마음의 안식처로 꼽는, 바로 '스타벅스'입니다. 낯섦의 연속에서 심신이 고단해져 있을 때 스타벅스를 만나면 그 자체로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는 경험, 다들 있으시죠? 내가 아는 메뉴, 맛, 향기, 색감, 분위기, 음악, 심지어 글자체까지도 우리 마음을 안정시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낯선 여행 중에 스타벅스를 만날 때 안정감을 느낄까요? 바로 일관성과 익숙함 때문입니다.
조셉 미첼리의 <스타벅스 웨이>라는 책에서 스타벅스의 일관된 경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객과 만나는 모든 접점에서 일관성 있는 제품, 프로세스, 흥미로운 경험 요소를 전달할 것이냐의 문제다. 일관성이 실현된 경험이 어떠한지는 제니와 같은 고객들의 발언에 나타난다. '저는 여행 중에 스타벅스를 일부러 찾아가요.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집처럼 포근한 기분이 들거든요. 스타벅스는 제품, 느낌, 고객 서비스 면에서 일정한 기대치를 충족하죠.'"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스타벅스를 들락날락하며 이미 경험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스타벅스는 전 세계 어느 매장을 가든 일관된 경험을 제공하죠. 따라서 우리가 낯선 곳을 여행하다가도 스타벅스에 들리면 일관된 경험에서부터 나오는 익숙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도 아이들이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익숙한 요소들을 배치해보기로 했습니다. 마치 낯선 세계를 여행하다가 스타벅스를 만나서 내 집 같은 편안함과 휴식을 누리는 것처럼 말이죠. 그 결과를 담아 스스에 처음 방문한 뉴비들의 빠른 적응을 돕는 4가지 비법을 알려드릴게요. 청소년을 만나는 운영자들이라면 바로바로 필기!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익숙한 공간의 주요 색감은 알록달록 원색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연령대가 낮을수록 이런 색감에서 '아동용'이라는 감각을 느끼기도 하고요. 스스가 전체적으로 톤이 차분하고 어두운 계열의 색으로 채워져 있다 보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낯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입장과 동시에 가장 먼저 눈에 마주치는 신발을 바꿨습니다.
"귀여워요.", "막 신고 싶어 져요."
아이들에게 익숙한 캐릭터와 색깔을 과감하게 도입했습니다. 과연 우리 공간에 이게 맞을까, 너무 튀나 구매하기 전에 수십 번을 더 생각했는데 지금은 대만족입니다. 물론 스스는 아이들이 처음 진입하는 곳에 신발장이 있어서 그렇지 꼭 신발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인상이 닿는 곳에 마음을 풀고 미소를 머금게 해주는 익숙한 요소를 두면 됩니다.
저는 스스에 처음 온 아이들을 가장 먼저 콘텐츠가 있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어떤 영화, 애니, 다큐, 웹툰을 스스에서 볼 수 있는지 카드뉴스 형식으로 만든 콘텐츠 리스트를 쭉 함께 보며 대화를 시작합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보는 거 좋아해요?"라고 물어보면 입을 절대 열지 않던 아이도 대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많은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합니다. 리스트에서 애니메이션을 검색해 어떤 콘텐츠를 이미 봤는지 함께 꼽아봅니다. 십중팔구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보았고 또 좋아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함께 찾아보며 대화를 나누면 공간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우리 공간에 엄청나게 좋은 콘텐츠들이 있다며 소위 예술성 넘치는 교육적인 작품들을 쭉 보여주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입니다. 공감대가 하나도 안 생겨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숨 막히는 공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래 친구들이 만든 작업물을 함께 꼼꼼히 살펴보는 것만큼 적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백 마디 말 보다 더 효과가 있죠. '스스오락존', '빵야빵야존'처럼 재미요소가 있거나 '스트레스 받으면 때리세요' 같은 웃음을 자아내는 작업물은 처음 스스에 온 친구들에게 반응이 좋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어몽어스나 마블, 해리포터 같은 익숙한 주제의 작업물은 이야기를 끌어내기 좋죠. 여자 아이들에게 아이돌 관련한 작품을 보여주면 특히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보다 더 좋은 것은 공간에 다른 스스러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손님이 아무도 없는 식당은 왠지 꺼림칙한 것처럼 말이죠. 공간에 다른 스스러가 있고 없고는 스스에 처음 오는 아이들의 적응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스스러가 작업을 즐기며 매니저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처음 온 스스러들도 한결 마음 편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것이 여의치 않을 때 다른 스스러가 한 작업물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스스의 운영자 자리는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공간이 ㄱ자 모양이기 때문에 모든 곳에 시선이 가지는 않습니다. 공간에 처음 온 친구들은 아무래도 운영자의 시선에 신경을 씁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혹시나 문제는 없을지 아니면 운영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은지 계속 살피죠. 가뜩이나 공간도 낯선데 운영자와 계속 시선을 마주쳐야 하다니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따라서 운영자가 공간을 설명하고 난 이후에는 운영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기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공간이 익숙해질 때까지, 매니저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는 섣불리 접근하기보다 '도와줄까요'라고 물어보고 접근하는 식이죠. 시간이 좀 쌓이면 누구나 자연스러워지잖아요.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해주며 시간이 좀 쌓이면 공간을 점차 받아들이게 돼요."
오랫동안 청소년 공간을 운영해 온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의 경험 많은 운영자들이 공통적으로 꼽아준 답변이었습니다. 작지만 소박한 나만의 공간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처음 스스에 와서 어색함 가운데 엉덩이를 붙인 자리가 계속 고정석이 되는 스스러들이 많습니다. 작게나마 익숙한 내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셈이죠.
이렇게 익숙함의 장치들을 거치면 신기하게도 점차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 체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예 입도 뻥긋하지 않던 아이가 이내 모기 만한 목소리를 내고, 집에 갈 때쯤이면 "매니저님" 이라며 큰 소리로 저를 부르기도 하죠. 이쯤 되면 스스 여행의 첫 발걸음 잘 내딛도록 도왔다며 저 스스로 뿌듯해집니다.
만 매니저는 무한도전을 참 좋아합니다. 이전에 무한도전에서 멤버 별로 심리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검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넓고 트인 공간 곳곳에 자리를 만들어 두고 멤버들이 어디에 앉는지를 살펴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앉는 자리에 따라 평소 가지고 있는 심리상태와 성향이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정중앙에 앉는 사람, 구석에 벽을 보고 앉는 사람, 제일 가까운 곳에 앉는 사람 등 멤버마다 제각각이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향도 제각각 다르고 현재 심리상태도 달라 낯선 공간, 낯선 사람에 대한 수용도도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이미 들어올 때부터 온 마음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반면 끝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거리를 엄청나게 두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룹으로 아이들이 온 경우 그중 가장 외향적인 아이를 골라 그 아이와 대화를 많이 나누고 눙치며 그룹 전체 아이들과 분위기를 좋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 왔거나 그룹 모두가 낯을 가리면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이 되죠.
그러나 어떤 아이가 왔든지 간에 스스를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운영자라면 나름의 비법들을 계속 쌓아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너무 낯설어 문턱이 높아 보이지 않으면서도 새롭고 신선한 감각은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낯선 것과 익숙한 것 사이의 균형 잡기가 필요합니다. 아마 운영자 역할에 있는 한 균형 잡기는 계속 연습해야 하는 영역일테죠.
자 그럼 <청소년을 만나는 운영자들을 위한 비법서>의 첫 챕터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스스의 음악과 관련해 흥미로운 do's and don'ts 비법들을 가지고 돌아올게요 :)
감사합니다.
만 매니저 드림.
[만 매니저 레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