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나실까? 지난 5월에 올렸던, 이대 미대생과 만났던 글? 오늘 글은 그때 적어 놓았던 글이다. 오늘이 일요일인 줄 알고 퍼질러지게 자다가, 일어나 출근하기 전에 글 저장함을 뒤져 그 글을 조금 다듬어서 올린다. ㅎ
그때 이대 미대생 관련 글을 올리면서 수십 년 만에 이화여대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이화여대 졸업식? 누구냐고? 당시 여친이냐고? ^^ 여동생이다. 늘작가와 여동생은 같은 해 졸업을 하였다. 나는 85학번(재수)이고 여동생은 88학번이었는데,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을 했기 때문에 우연히 같은 해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1주 전에 브런치 독자이신 astreia님 부부를 만났는데, 깜놀. astreia님이 여동생과 같은 학과 후배였다능 :) 이글 보실랑가? 보시면 라이킷 누르고 댓글 주세요.
그리고 내가 대학 입학식과 졸업 때 찍은 사진도 이 글 적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왼쪽 사진이 입학식 오른쪽이 졸업식
그렇다. SNS에서 처음으로 공개하는데, 늘작가는 고려대학교를 입학하고 졸업을 했다. 편입생 아니다. 왼쪽 사진 아래에 사진 찍은 연도가 있다. ^^
아니, 늘작가가 시골 깡촌 흙수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형제자매들이 모두 대학교를 그것도 두 명은 학비가 비싼 서울 사립대를 졸업을 할 수 있었을까? 둘 다 입학 성적이 우수해서 4년 장학금을 받았나? 아니다. 그 정도로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 교육에 대한 헌신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한(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금수저였던 우리 집이 쫄딱 망하여 국민학교 2학년(라떼는^^)부터 대학 입학할 때까지 내 집은커녕 전세는커녕 사글세 집에서 지냈다. 그런데 우리 2남 1녀는 공부를 잘해서 항상 전교권이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예전에는 자식들이 공부 잘하면 아무리 가난해도 괄시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너희들은 돈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해라. 만약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유학 가겠다고 하면 무슨 수를 쓰서라고 서울 보내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당시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이런 말이 죽어라고 공부를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힘이 되었다. 이 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부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형은 아쉽게도 서울대나 인서울 유명 사립대에 입학할 성적은 되지 못해서 지방 국립대를 들어가게 되었다. 만약 서울대학교나 상위 사립대를 입학할 점수를 받았으면 당연히 서울에 보내 주었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서울대학교였고,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었다. 그런데 고 2 때 편두통과 허리가 아파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첫 해 고려대 지망을 했는데, 탈락을 했다. 당시 전후기 모두 뽑았던 성균관대를 가려고 했지만 부모님 특히 아버님 반대로 못 가게 되었고, 다시 재수를 하여 고려대에 합격을 했다. (재수해서 이전보다 좋은 대학 가긴 쉽지 않다. ㅎ)
아버님이 반대한 이유는 "내가 너희들을 서울에 유학 보내는 대학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그리고 ㅎㄱ 너는 이화여대까지이다. 4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지방 국립대학교 가라."
아버님은 부산 동아대 나오셨다. 아버님과 내가 태어난 곳은 같은데 00군 00면 00 부락으로 아래 사진 속 촌락이다. 당시 이 동네에서 대학 졸업한 분은 아버님이 최초였다. ㅇ
흐릿한 사진 맨 위 가운데 가구수 20호 정도 깡촌
당시 우리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서울에 자식들 대학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부모님은 위 4개 대학만큼은 무슨 일을 해서라고 졸업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셨다.
내가 재수하여 대학교 지원(당시는 70%학력고사 + 30% 고교 내신, 학력고사 이후지원, 1개 대학만 가능)할 때 서강대 경영학과나 성균관대 법학과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때 아버님이 단호하게 그러면 지방 국립대 장학생으로 가라고 한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당시는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등 지방 국립대 수준도 엄청 좋았다. 서성한 정도 레벨이었다. 일부 학과는 고연대 중위권 학과 정도였다. 당시 부산대 문과 탑인 법대는 충분히들어갈 수있었지만 나는 서울에서 너무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서울에 가서 공부하려면? 뭐 선택은 딱 하나 뿐이었다. 내 적성이고 나발이고 성적에 맞추어 고려대나 연세대 외에는 서울로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능. 두 개 대학 중 난 어렸을 때부터 고려대를 좋아해서 고민하지 않고 내 성적에 맞추어 아주 안전하게 고려대 중위권 학과를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강하게 주장하셨던 돌아가신 아버님께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님 계신 국립하늘숲추모원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군대를 가게 되었고(간 이유는 집안 사정 때문에 두 명이 대학을 다니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여동생이 대학 입학할 때가 되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여자의 경우 서울대 정도가 아니면 거의 다 지방 국립대를 보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달랐다. 특히 어머님의 강한 의지가 여동생이 서울에 가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는데, 외갓집은 시골에서 어마한 부자였다. 외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친일 아님^^) 돈을 모아 해방 후 귀국을 하여 고향 땅과 산을 다 샀다
외갓집 앞 들녘
위 사진 속보다 훨씬 더 많은 논, 밭, 산이 외가댁 재산이었다. 그런데 만약 당시 그 돈으로 부산이나 인근 중소도시 땅을 샀다면 수천 아니 수조 원 재벌이 되었을 텐데...ㅎ 이 동네는 깡촌이라 지금도 논 한 평에 몇십만 원 밖에 하지 않는다.
그렇게 부자였지만 어머니는 중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어머니 빼고 다른 형제자매들은 전부 대학을 나왔지만... 이유는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공부를 엄청 잘하셨다. 어머니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보내달라고 간청을 했다. 인근 중소도시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혼자서 밥하고 빨래하고 다 할 테니... 그런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형제자매들이 고등학교와 대학을 가는 것을 눈물도 지켜봐야 했다. 장녀이고 여자라서 집안에서 밥 하고, 일하고...
배우지 못한 당신의 한을 여동생에게 풀어주었다. 아버님이 여동생을 서울까지 공부시켜야 하냐고 이야기했을 때, 어머니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 여동생을 서울에 보내지 못하면 둘째도 대학 다니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여동생도 서울대학교는 힘들었꼬, 고연대와 이화여대 중 택해야 했는데, 부모님은 내심 이화여대를 원하셨다. 지금이야 이화여대, 여대들 입학 성적이 낮지만 라떼 이화여대 상위 학과가 고연대 중위권 학과 정도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남녀공학보다는 여대 선호가 강했다. 이화여대는 기숙사도 있어서 금상 첨화. 여동생은 2학년 때까지는 이대 기숙사를 다녔고, 이후 친구 두 명과 자취를 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성적 우수 장학금도 받았고.
그런데, 이런 어머니의 판단은 정말 옳았다. 우리 가족 2남 1녀인데, 여동생이 지금 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다. 아들 두 놈을 다 필요 없다. ㅎㄱ아 다시 한번 고맙다. 참고로 내가 쫄딱 망했을 때, 나를 살려준 것도 여동생이다. 평생 빚 갚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일부터 늘작가는 여름휴가이다. 이번주 목요일 어머니와 여동생 세 명이 함께 고향으로 휴가를 간다. 매년 여름에는 직계 가족 3명만 고향집에 자주 내려간다. 브런치스토리도 휴가를 간다. 2주 휴가 보내고 8월 26(월) 아침에 늘푸르게 세 번째 브런치북 첫 글로 다시 찾아오겠다. 모두를 휴가 잘 보내세요.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