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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작가 Oct 09. 2021

공부로 바뀐 어린 시절의  삶

#4 인생 스케치

지난 주에 이어서,,,


그렇게 9월 월말 고사에서 전교 3등을 하게 되니(4학년 2반에서는 당근 1등이었고요) 읍내 친구들이 저를 더 이상 시골 촌놈이다(읍내도 村인데 말입니다 ㅎ), 늘푸르게 집이 가난하다는 등 놀리지 않았습니다. 학교 쌤들도 갑자기 저에게 친절해지고~^^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저를 부르시더군요. "늘푸르게야, 주인집에서 너보고 집에 와서 너 친구 ○○이랑 밥 먹고 놀라는데 갈래?" 저는 살짝 고민 되었어요.  "갈까 말까""  그러다 그냥 쿨하게 "갈게요!"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만약 제가 가지 않는다고 하면 세입자 입장에서 주인과 껄끄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그 어린 나이에 했었어요. 추측컨데 어머니께서 제가 혹시 자존심 상할까 봐 물어보신 듯해요.


주인집에 가니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 정확한 메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일단 갈비, 그 비싼 갈비는 있었던 기억은 납니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렸더라고요. 내심 속으로 "뭘 별 것도 없구먼(금수저 경험이 있어 존심 상해서 ㅋ)" 하면서도, 허겁지겁 무지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런 음식 먹어 본 것은 초딩 2년 집이 망한 이후로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이제 우리 집은 더 이상 그런 고급진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으니까요….ㅋ 쪽팔리네요


그리고 친구 방에 가니 “우와 ~” 방에 온갖 책과 만화책.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중앙 보물섬 등등이 쌓여 있었습니다.


# 출처 모름


혹시 저 어린이 잡지를 아는 독자님 계실까요? 계시면 댓글로 좀 남겨주시겠어요? 당시는 위와 같은 어린이용 월간 종합지는 은수저 정도는 되어야 구독 가능했어요. 눈이 휘둥그래 지더군요. 금수저에서 몰락하여 무수저 3년 만에 진짜 촌놈이 다 된 것이지요. 그날 이후로 그 친구 방에 살았어요. 저 월간 종합지를 읽고 싶어서요.  


9월 월말 고사 이후 저를 친구로 만들어 주려는 읍내 유지 부모님들이 많았습니다. 자랑이긴 하지만 저는 초중고딩 시절 친구들이 모르는 것 물어보면 친절하게 잘 알려 주었고, 내가 필기한 공책 빌려달라고 하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잘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공부 잘하는 친구들 중에서 잘 알려주지 않고, 공책 절대 빌려주지 않는 친구들 있지요? ^^


기억나는 친구 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은 읍내에서 큰 비즈니스를 했었는데, 그 친구 어머님은 공부 잘하는 아들 친구들을 그룹으로 하여 집으로 초대 자주 하시더라고요. 요즈음도 이렇게 끼리끼리 어렸을 때부터 그룹을 만들어 길게는 대학과 성인 될 때까지 친구로 지내게 되는 경우도 많지요. 그 집  아버님께서는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됩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보통 돈이 넉넉한 집 자녀들이 공부를 잘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 이유는 아실 테고요. 그런데 집이 가난해도 이렇게 공부를 잘하면 그런 그룹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저는 직접 체험을 했습니다. 이후 저는 무사히 그 토호 유지세력(?) 친구 그룹에 진입을 해요. 물론 가난한 집안 친구들도 많았지만요. 그런데 그때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시골 가난한 이웃보다 읍내 부자 이웃분들이 훨씬 좋으시다~~^^


5학년 올라가서 1학년으로 제 여동생이 입학을 해요. 여동생 역시 전교권에서 항상 맴돌았어요. 형은 저보다 2년 위

형 역시 공부 잘했고요. 그러니 아무니 저희 집이 가난했어도 읍내에서 ○○○ 아무개 자식들이 공부 잘한다 소문이 나서 늘 부모님들은 힘들어도 고생하는 맛이 난다고 하셨어요. 부모님들이 저보고 공부하라는 말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지만요.

아버지


# 출처 : pixabay

제 기억 속 아버지는... 술 한잔 드시고는 늦은 저녁 집에 들어오시면 저희들이 좋아하는 포장마차 군만두 한 봉지 싸서 귀가하시곤 했어요. (통닭은 너무 비싸 1년에 1~2번) 그때 먹었던 군만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습니다. 속은 당면만 들어가 있는 만두였지만요. 제가 만두를 무지 좋아해요. 나는 그냥 맛있어서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더군요. 아버님께서는 술 한잔 드시고 3남매를 앉혀 놓으시고는 너희들 지금 가난하지만 기죽지 말고 살아라. 아버지가 너희들이 공부 잘하면, 나중에 ○○시 고딩은 물론 서울에 대학까지도  무슨 일이 있어도 보내주마. 아버지께서 술 한잔 마신 후 버릇처럼 저에게 하시었던 말이 요즘도 자주 생각이 납니다. “늘푸르게야,  니 아버지, 000(본인 이름을 부르셨어요)  아직 안 죽었다~”  그래  "우리 아버지 죽지 않으셨다."


그래 지금 우리 집안이 이렇지만
가난해도 꿈은 버리지 말자.
우리 집안 반드시 내가 일으킨다..


차남인데도 저는 살면서 항상 이 생각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린 시절에 생각했었던 이 생각을 잊지 않고 있고, 지금 열심히 계층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릴 때 다짐했었던, 집안을 일으키는 수준까지는 아직 되지는 못했지만, 이제 은수저 정도 온 듯해요. 아직 대기업 직장 현직이고, 강남에 자가로 거주하고 있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딸과 함께 행복하고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늦게 깨달았지만 재테크와 돈 공부와 투자하면서 자산도 계속 불려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보다는 더 나은 미래, 저의  제2인생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살아가기로 정하고 현재 그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늘푸르게는 네이버 블로그 이웃 20,856명인 파워 블로그로 성장을 했습니다. 지난 5월부터는 이곳 브런치에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8월 15일부터는 인스타에서 1일 1인스타하고 있습니다.


지금 늘푸르게가 이렇게 잘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아버님께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술 한잔 드셨을 때 이야기하신 그 약속, 저를 서울까지 유학 보내어 대학 공부시켜주겠다는 그 약속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의 그 은혜 덕분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네요.

아버님 감사합니다.
늘푸르게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올해로 아버님 돌아가신 지 7년이 지났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지금 경기도 양평의 국립하늘숲추모원(국립수목장) 계세요. (부모님 모실 곳이 없는 분들은 이곳을 한번 고려해보세요. 강추합니다) 오늘따라 아버님이 참 많이 보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번 가을에는 아직 아버지 계신 곳을 아직 가보지 못했네요. 조만간 어머니 모시고, 아버지 뵈러 가야겠습니다. The End.


올해 봄 아버님 기일 무렵


브런치에 매거진 기능이 있는 것을 지난주 글 올린 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존 우리인생 늘푸르게 모든 글은 4개의 매거진으로 발행을 했습니다. ①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될 때까지(자기 계발 관련 글) ② 함께 걷는 인생길(늘푸르게의 인생 이야기) ③ 직장인 돈 공부와 재테크(재테크) ④ 직장인의 삶 직장인의 길(직장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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