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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작가 Oct 02. 2021

어린 시절의 유일한 희망 ...'공부'

#3 인생 스케치

안녕하세요? 브런치 독자 여러분. 벌써 10월이네요. 오늘은 늘푸르게 유년 시절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전 제 소개했을 때 말씀드렸던 적이 있었는데, 시골 깡촌에서 태어났었지만, 아버지께서 출세하고 승승장구하여 지방 대도시에서 금수저로 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도 가지 못하는 별 다섯 개 호텔에서 사우나하고, 외식은 호텔이나 고급 일식집, 집도 2채였고, 저의 금수저 시절 사진은 전부 칼라입니다. 아래 사진은


제가 국민학교(당시에는 초등학교가 아니었지요) 입학 무렵에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가운데 남자 어린이가 늘푸르게입니다. ^^고향 친구 중 초딩 시절 사진이 칼라인 사람은 저뿐이었어요. 칼라 사진은 제가 중딩 정도에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다 아버님께서 정치파동에 휩쓸려 (부정 아니고요^^) 보스를 위해 충성하다, 그 보스의 죄를 다 뒤집어쓰고 감옥까지 가셨습니다. (나중에는 복권되셨어요) 당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쫄딱 망하고 당신의 고향으로 낙향을 했습니다.


망해서 고향에 온 우리 가족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그때 친인척들과 동네 이웃들에게 당한 부모님들의 수모는 지금도 제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답니다. 아버지가 부자일 때 알랑방귀 뀌던 사람들의 행동이 망하니 180% 달라지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 생생하게 보았어요. 이때 저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시골 인심이 사실 더 나쁘다는 것을요, 시골 사람 좋다는 것은 미디어에서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시골 출신 많은 지인들도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인심 좋고 살기 좋은 시골도 있겠지만요...


하루 세 끼, 끼니 걱정을 해야 했고, 검정 고무신 신고 학교 다녔어요. 그래도 책가방은 있었네요. ㅎ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아 저녁엔 초롱불이나 촛불로 밤을 보냈습니다. 지금 같은 가을에야 수확기라서 걱정이 덜 하였지만, 보릿고개라고 하지요? 보리가 나오기 이전(보리는 6월에 수확합니다) 초봄에는 집에 있는 곡식이 다 떨어져,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면서 진달래와 소나무 껍질 , 소나무 꽃(나중에 솔방울이 됩니다)그리고 개구리와 뱀을 잡아먹고 보리고개를 넘겼습니다. 물론 끼니를 거른 적도 많았습니다. 아래 마을 사진 한번 볼까요?


# 출처 : 미상

늘푸르게가 살던 마을 수준, 딱 이 정도입니다, 초가집이 메인이고 뒤쪽처럼 지붕개량이 시작되던 초기 마을. 아니 일제강점기나 50~60년대 이야기가 아니냐고요? 아니고요 우리나라 70년대까지는 이런 곳이 꽤 있었습니다. 제가 아마 대한민국 마지막 보릿고개 세대일 것 같네요. 제 후배나 위로 몇 년 선배 중에서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산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 시골 마을에는 전깃불이 초딩 4학년에 들어왔습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강원도 두메산골 외에는 전깃불이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곳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그 어린 나이에 뼈저리게 느낀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가난하면 안 된다.
그리고 내 살 길은 공부뿐이다


당시 시골 동네 국민학교(지금은 폐교 되었습니다)는 한 학년에 꼴랑 2개 반인 미니 국민학교였긴 하였지만, 항상 전교 1등을 했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나라 형도 여동생도요. 그래서 그 마을에서 망해서 부모님이 내려오셨지만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이 부모님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더군요.


이렇게 살고 있었는데, 아버님께서 고향으로 낙향 한 이후 그 보스는 다시 힘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후 고향 땅에서 청운의 꿈이 꺾이고 (30대 초~중반) 낙향하여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 보스가 아버님을 천거하여 읍내 요직으로 다시 재등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국민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읍내로 전학했어요. 하지만 직장만 잡은 것이지 여전히 가난하여 사글세 집에서 살았습니다.


전학했었던 당시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4학년 2반(이 반 친구 1명이 지금 저의 베프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왔다고 "야, 00 부락 촌놈" 이렇게 저를 많이 놀렸어요, 그리고 알고 보니 그 집주인이 에효~~~ 같은 학년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지요. 깡촌 출신에 엄청 가난하다고요, 저는 그 수모(?)를  받으면서 "그래 너네들 맘대로 놀려라 9월 월말고사 시험 치고 한번 보자"하고 속으로 칼을 갈았습니다.  아무리 깡촌 출신이고 꼴랑 2개 반 시골 출신이었지만 저는 공부에는 자신 있었습니다.


공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고 시간에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학 와서 첫 시험이라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습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9월 월말고사 때 제가 전교 3등 했어요, 읍내 학교는 1개 반 학생이 60여 명, 총 10개 반이 있었습니다, 국민학교 규모로는 꽤 컸지요. 그 읍내 학교는 역사가 아주 깊은 초딩입니다. 지금 100년이 넘었네요. 제가 전교생 한 학년 600명 중에서 3등을 한 것이지요. 그것도 읍내라는 쟁쟁한 곳에서요.  그때 성적 받고 저도 좀 놀랐어요, 전교 10등 안에 드는 것이 제 목표였거든요.


당시 읍내 00 국민학교에서는 전교 3등까지 장학금을 주었어요, 만원... 지금도 기억이 나네요, 당시 만 원이면 엄청 큰 금액이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짜장면 한 그릇이 200원 정도 했던 것 같네요. 지금 짜장면이 7,000원 하나요? 7,000원 × 50배 = 350,000원이네요, 지금 화폐가치로 초딩에게 35만이면 큰 금액이지요. 전교생 모인 아침 운동장 종례 시간에 교장 쌤이 내 이름을 부르고~ 시상대에 올라가서 상장과 봉투에 만원을 받았습니다. 당근 소문이 쫘악 났지요, "도대체 ‘늘푸르게’라는 아이는 누구여?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때부터 친구들이 저를 보고 찍 소리도 못하더군요, 그때 알았지요


 공부 잘하면 짱 먹는다^^



그리고 그 이후 저의 어린 시절 삶에는 많은 변화가 오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주 토요일에 2편으로 이어서 해 드릴게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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