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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소 Dec 26. 2020

우리집 호박과 어린왕자의 장미꽃이 말해준 것

가끔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참으로 기묘한 모양새였다. 흙먼지가 묻어 탁한 겨자색의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껍데기, 무심하게 툭 자른 굵은 넝쿨 꼬리. 식탁에 놓인 이질적인 광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호박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나? 

핼러윈 같기도 하고, 민속촌에서 본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물체가 이상하리만큼 신기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호박이 신기하지? 마트에서도 많이 봤는데.”

“눈여겨보지 않아서 그렇지 뭐.”


주방에서 분주히 그릇을 씻으며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진다. 

아아, 그렇구나. 요리조리 살펴보고, 손으로 똑똑 두드리며 한동안 호박을 바라봤다.



문득 김춘수 시인의 명시 ‘꽃’이 생각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허둥지둥 통근버스로 향할 때 아침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길가의 꽃이 눈에 보일 리 없다. 아무리 예쁘게 심어놓은들 아무도 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모처럼의 휴일에 여유롭게 산책하다가 ‘어, 여기에 꽃이 있었네.’하고 발견했을 때 비로소 꽃은 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어린 왕자의 장미꽃처럼, 내가 인식하고 눈여겨본 순간 의미 있는 호박이 되었다.






필름 카메라를 빌려 출사 나간 날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필름 카메라의 신중함과 기다림의 미학에 끌렸다.


‘사진 덕후’ 지인에게 카메라를 몇 개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 어릴 적 여행 가서 사용하던 1회용 카메라나 요즘 유행하는 깜찍한 토이 카메라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빛의 양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수동 카메라를 선택했다. 수동 DSLR은 종종 만져보았지만, 필름 카메라는 처음이었다.


제아무리 얼리어답터라 자부하는 사람도, 새로운 모델을 구할 수 없는 것이 필름 카메라다. 디지털 촬영의 급격한 성장에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한 모델은 1981년 출시된 일본 미놀타 사의 X-300이다. 과연 어떤 꾸밈이나 군더더기 없이 쇠붙이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투박한 모습이었다. 손에 쥐니 차가운 겨울바람의 냉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원통에서 필름을 주욱 잡아 빼서 카메라에 끼워 넣었다. 찰-칵. 셔터를 누르니 들리는 정직한 소리가 정겹다. 딸깍. 찍을 때마다 필름을 감는 행위도 필름 카메라만의 손맛이다.



광화문 일대가 오늘의 코스다. 점심시간마다 이곳으로 출사 나온다는 지인의 추천이었다. 덕수궁, 러시아 영사관 등 무심코 지나쳤던 길, 여유와 함께하니 새롭게 보였다. 


찰-칵, 찰-칵. 36장이던 컷 수가 한 자릿수로 줄어들었을 무렵, 지인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닿은 곳은 좁은 길 귀퉁이의 작은 나무들의 공간. 들여다보니 퉁실한 삼색 고양이가 푸짐하게 앉아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살곰살곰 무릎을 꿇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졸기 시작한다.


“엄청 뚱뚱하네요.”

“저 가게가 감자탕집인데, 저기서 이 고양이 밥을 챙겨주거든요. 구석에 얘 집도 있어요.”


실외기가 놓인 가게 뒤편에 까만 통이 놓여있다. 굳이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위치다. 걷는 곳곳마다 길고양이 쉼터가 눈에 띄었다. 공연을 보기 위해 세종문화회관만 바라보며 바쁘게 걷던 때는 볼 수 없었던 풍경. 길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의 온기가 필름에 새겨졌다.




눈여겨보지 않아 기묘하게 느낀 호박,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된 그. 그리고 그냥 지나쳤다면 영영 몰랐을 길고양이들의 공간.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마법 같은 모습이자, 작고 정겨운 네모가 부리는 마법이었다.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라는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한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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