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이소 Dec 23. 2020

예상치 못한 기억들이 찾아오는 순간

때로는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책장이 가득 찰수록 통장의 숫자가 줄고 있었다. 잔고의 단위가 바뀔 때쯤 위기감을 느꼈다. 


책장 자리도 없고 돈도 없으니 다 읽은 책을 팔 법도 한데 그러지도 못한다. 밑줄을 긋고 이런저런 메모를 적은 탓이다. 

때마침 플랜티넘 회원을 알리는 YES24의 어플 알람이 말하는 듯했다. ‘이소야 이소야 새 책 줄게 월급 다오~’     


통장이 아파하고 있다. 내 가슴은 더 아프다. 즉시 알라딘 중고 서점으로 달려갔다.(안 사는 선택지는 없다.)  







아웃렛 매장 5층에 널따란 매장이 있었다. 이사 온 지 2년이 넘었는데 와보기는 처음이다. 전부 다 둘러보겠다는 일념으로 문에서 가까운 쪽부터 살핀다.

      

어라, 잊고 있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타나토노트]


공부 빼고는 다 재밌던 고등학생 시절 해리포터 이후 처음으로 완독한 책이었다. 

바랜 표지와 정직한 명조체의 글자로 세월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출판일 2000년 9월 15일. 

‘아무리 중고여도 이 책은 안 팔리겠다.’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는데 중간에 나뭇잎 하나가 끼어있었다.     



살짝 힘만 주어도 파사삭 바스라질 것 같은 바싹 마른 아기 손만 한 잎사귀. 

책 표지만큼이나 오랜 시간 그곳에 있었던 모양새다. 



문득 잎을 끼워둔 책 주인이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일까?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일까? 이 나뭇잎은 책갈피 대신이었을까? 197페이지에 끼워둔 걸 보니 여기까지 읽었나? 뒷내용도 궁금했을 것 같은데... 현실이 바빠서 더 이상 책장의 책을 꺼낼 여유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는 엄마의 책을 아들이 내다 팔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사 오면서 함께 가지 못한 책이라든가. 당신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처럼.



책과 나뭇잎을 들고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나뭇잎 하나로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가상의 추억을 만들어 혼자 머릿속으로 소설을 썼다. 


책 주인이 이 책을 내다팔기 전 책 사이의 작은 기억을 발견했다면 무언가를 떠올렸겠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걸었던 공원 산책로, 친구와 쉬는 시간마다 뛰어갔던 매점의 풍경. 지난 음악을 들으면 그 시절이 생각나는 것처럼.


과거에 즐겼던 음악을 들으면 예상치 못한 기억들이 훅 찾아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렴풋한 당시의 감정들까지도, 추억을 배달해주는 우주선 속에 같이 담겨 온다.   


나에게 god의 촛불하나는 92번 버스에서 내려 정인이와 함께 걷던 좁은 등굣길의 기억을 가져다준다. 일본인 친구 유키가 좋아하던 aqua times의 千の夜をこえて는 눈이 무릎까지 내려 자전거를 두고 집까지 걸어간 아키타에서의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때로는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서글퍼지기도 한다.


즐거웠던 추억은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 없어서,

힘들었던 과거는 당시의 내가 참 가여워서.     






지금 듣는 음악, 이번 주말에 보는 공연, 책에 해둔 메모는 오늘도 차곡차곡 내 기억 보관 상자를 꾸리고 있다.

내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고 제목마저 잊었을 때쯤 다시 꺼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저녁에는 책 몇 권을 싸들고 중고서점에 가야겠다. 

언젠가 나의 메모를 발견할 누군가가 즐거운 사색에 빠지길 바라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