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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소 Dec 25. 2020

경품에 당첨된 언니를 기분나쁘게 한 한 마디

타인의 기분을 조종하는 매직 방향키


당신이 산 주식이 어느 날 200% 급등했다면, 혹은 경품에 당첨돼 BMW를 받게 되었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런 당신을 보며 친구들은 무슨 말을 할까?


대박이야, 올해 운 다 끌어다 썼나 봐!”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커다란 행운을 거머쥐었다는 의미로 흔히 쓰는 말이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나의 운을 빡빡 긁어다가 여기에 썼으니, 앞으로는 어떤 일에도 운이 따를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냥 개운한 말은 아니다. 마치 내 안의 운이 인당 배급되는 한정된 자원이라는 듯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평생 운 다 끌어다 썼네!’라는 무서운 말을 하기도 한다.


운끌(평생 쓸 운을 끌어모은다)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대학생 시절 일이다.  동기 언니와 함께 몰려다니는 같은 그룹은 아니었지만, 종종 만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둘 다 일본 아이돌을 좋아했다. 취향이 같으면 친해지게 마련이다.


그날도 학교 카페에서 언니를 만났다. 얼마 전 일본 아이돌 콘서트에 다녀온 언니는 엄청난 소식을 전했다. 각 멤버들이 한 자리씩 추첨해 싸인 포스터를 나눠줬는데, 언니가 뽑혔다는 것이다. 무려 3만 명이 모인 도쿄돔에서 일어난 일이다. 심지어 가장 좋아하는 멤버가 전한 행운이었다.


나는 쉴 새 없이 대박! 대박! 을 연발했다. 그런데 들뜬 나와는 달리 언니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 감흥이 떨어졌나?’라고 짐작했지만 아니었다. 전하고 싶은 심오한 메시지가 따로 있었다.


처음에는 언니도 잔뜩 흥분해서 친구 A에게 알렸다고 한다. A가 하는 말이 “너 평생 운을 다 썼네.”였다고. 방방 날아오르던 기분이 한순간에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아무리 좋아도 이런 일에 평생 운을 다 쓰고 싶진 않은데’ 하지만 B의 대답은 달랐다. “이제 너 운길이 텄나 봐. 앞으로 계속 좋은 일만 생길 거야.” 이 한마디에, 9회 말 역전 홈런을 날린 것처럼 다시 기운이 펄펄 났다고 한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보니 주변 사람의 말과 행동에 휘둘릴 때가 많다. 오늘 좀 피곤해 보인다는 말에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평소 친절하던 상사가 인사를 안 받으면 온종일 속앓이를 한다. 그러면서도 나의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가 상대에게 끼치는 위력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언니가 전한 메시지를 가슴에 새긴 후부터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동생이 차를 사자마자 주차장 벽을 들이받고 수리를 맡겼다. “아이고, 새 차인데 어떡해?” “그러니까 조심 좀 하지.” “괜한 돈만 나가네”라고 한다면 안 그래도 위축된 어깨가 더 둥글게 말렸을 것이다. 이미 수없이 자책하며 스스로 했을 말을 굳이 한 번 더 들려줄 필요는 없다.


“처음에는 다들 한 번씩 박아. 나도 초보 때 두 번이나 문짝 찌그러뜨린 거 알지? 남의 차 안 긁고 사람 안 쳤으면 됐어. 액땜한 거야” 범퍼가 찌그러져 새 차가 흉해진 상황은 똑같다. 말의 방향키만 살짝 돌렸을 뿐이다. 동생 마음속 파도가 금세 잔잔해졌음을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후배의 실수를 비난하거나 나무라지 않는 건 나의 철칙이다. 직급과 경력이 업무능력과 비례하는 회사에서 윗사람의 말은 아래 직원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물론 업무상 실수를 저질렀을 때 지시와 가르침은 명확히 한다. 다만 후배의 기분 방향키를 어두운 쪽으로 향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어빙 고프만은 "사람들은 모두 다른 이들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통제하려들며 스스로를 연출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싫든 좋든 끝없는 연기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악역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선한 연기를 펼치는 건 어떨까.



동기 언니와 대화를 나눈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때부터 누군가에게 행운이 찾아왔을 때 “운 다 썼네!”가 아닌 “운길이 트였네!”라고 말한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무리 바보 같고 좌절한 상황이라도, 발상을 요리조리 뒤집으며 방향키를 조절하곤 한다. 웃기보다는 찡그릴 일이 더 많은 요즘, 세상에 마음의 키가 좀 더 평온한 방향으로 향하길 바라면서 나 자신을 연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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