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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소 Dec 30. 2020

모르는 직원이 청첩장을 건넸다.

내게 사소한 일, 누군가에게 고마운 일.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짐짓 여유로운 척했지만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난감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직장인 스킬 ‘안 반가울 때도 사용 가능한 반가운 미소’를 장착했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얼굴이다. 상대는 친근함을 담아 청첩장을 건넸다. 


혹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그러나 봉투에 명확하게 적힌 내 이름 세 글자를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부서까지 방문해서 전달할 정도니 어느 정도 나를 친밀하게 여겼을 터였다. 무해한 미소를 띤 얼굴을 향해 ‘당신은 누구?’라고 도저히 물어볼 수 없었다.


삐용-삐용- 머릿속 비상벨 소리가 더욱더 커졌다. ‘우선 아는 척을 하자. 방심하면 안 된다. 조금의 실수도 굉장한 실례다. 근데 반말을 써야 하나, 존댓말을 써야 하나?’ 혼란스러움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어머? 결혼...! 너무 잘됐다... 언제...?”


약간의 중얼거림으로 말끝을 최대한 흐렸다. 필사적이었다.


“다다음주예요. 수원에서요.”


곧 결혼하는 젊은 여성.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해 보이는 외모. 나를 향한 존대. 반말을 했다면 이 정도로 기억이 안 날 리 없다. 찰나의 순간, 머리를 수도 없이 굴려 결론을 내렸다.


“아~ 바쁘겠네. 축하해요.”


나름 논리적인 추론으로 적당히 반말과 존댓말을 섞었다. 부디 티가 나지 않았기를. 


커피 한 잔 하고 가라는 접대용 멘트에 그녀는 다행히 손사래를 쳤다. 바쁜 사람 시간 뺏을 수 없다며. 시간은 괜찮았지만 대화가 길어지면 곤란했다. 아슬아슬한 거짓말이 금세 탄로 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뒤, 옆자리 선배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지금 온 분 누구예요?”


“아는 사람 아니었어?”


선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이었다. 


직원검색으로 그녀가 위층 회계과 직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이 없었다. 업무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모르는 사이였다. 오늘까지 보고해야 할 기획서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청첩장 속 그녀의 이름을 빤히 노려보았지만 기억날 리 없었다.


선배의 조언으로 메신저 대화함을 뒤졌다. 단서를 찾았다.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니 주고받은 쪽지에 인연이 숨어 있었다. 


몇 달 전 주말, 급한 일이 생긴 그녀 대신 당직을 서줬다. 별 것 아닌 일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마침 할 일 없는 주말에 당직비를 벌었을 뿐이다. 다음날 그녀가 커피와 쿠키를 사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내게 바람처럼 스쳐간 일을 그녀는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날에 다시 한 번 마음을 전한 것이다. 고마움을 기억하고 경사에 초대한 상대가, 자신을 누군지조차 기억 못한다면 얼마나 섭섭할까.


사람의 성격과 기억이 이렇게 다르다. 내게는 스치는 바람처럼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오래 간직할 만큼 고마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깃털처럼 사소한 말,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간직할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닐까. 따듯한 마음과 뜬금없는 깨달음을 동시에 건넨 그녀에게 이 글을 통해 고마움을 전해본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와 입사 동기였다. 동기가 50명이 넘어 몰랐다는 변명도 어쩐지 귀가 화끈거린다. 결혼식엔 직접 가지 못했다. 동료에게 축의금 전달만 부탁했다. 다음에 마주쳤을 땐 진심어린 축하와 반가움을 전하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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