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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소 Dec 23. 2020

오늘도 퇴근 후 운동을 안 간 내가 한심할 때

나를 향한 비난이 칭찬으로 바뀔 때



올 초 친구가 방배동에 피아노 연습실을 오픈했다. 학원 강사와 개인 교습을 병행하다 마침내 자신의 둥지를 꾸렸다. 커다란 화환을 보내고 주말에 방문했다. 아담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일반 벽보다 두껍고 폭신한 재질의 방음벽은 채도가 낮은 남색과 회색이 조화를 이뤘다. 안정감이 느껴졌다.

   

방마다 달린 도어록이 어릴 적 다녔던 피아노 학원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피아노 레슨뿐만 아니라 보컬 연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간을 대여하는 용도로도 활용하기 때문이다. 입구엔 사장님 입맛이 드러나는 딸기맛 캐러멜이 앙증맞게 놓여있었다.


얼마 전 친구를 다시 만났다. 이제는 수강생이 제법 많아졌다고 했다. 퇴근 후 취미로 배우는 직장인 수강생이 많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바이엘 소나타부터 단계별로 배우지 않는다. 원하는 한 곡을 완주하는 취미 클래스를 선호한다. 문득 생각했다. ‘나도 배워볼까?’ 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던 초등학생 시절의 먼지 쌓인 기억이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레슨해?”


한두 번 정도보통.”


그럼 한 달이면 한 곡 칠 수 있나?”


못 치지.”     


익숙한 질문이라는 듯 씩 웃으며 대답한다. 


대부분 연습도 못 하고 와여기서 치는 게 다야지난주에 배운 걸 다시 연습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려실력이 금세 늘긴 어렵지 


맞는 말이다. 영어단어도 하루만 지나도 기억이 안 나니까.


그래도 오는 게 기특해퇴근하고 얼마나 힘들겠어빠질 때도 많지만나오는 거 보면  대단해오는 것만으로도 엄청 칭찬해주고 있어.” 





친구의 말을 들으니 그간 돈만 갖다 바친 수많은 운동센터가 생각났다. 집 앞 핫요가, 회사 근처 필라테스, 새로 오픈한 스피닝, 놀이처럼 재미있다는 점핑 운동, 뼈만 남긴다는 복싱 다이어트. 돈을 내고 가지를 않으니, 가족에게는 지역 상권을 살리는 기부 천사 타이틀이 붙은 지경이다. 


친구 말마따나 퇴근 후 갈 요량이었다. 등록할 때마다 주 3일이 아니라 매일 나갈 자신감이 넘쳤다. 의지가 충만한 상태에서 6개월 등록 시 20% 할인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심지어 중간에 일시 정지도 가능하다니 그야말로 나를 위한 자리였다. '꾸준히 할 운동인데 할인받으면 좋지.' 꾸준히 했던 적이 없음에도 늘 탁월한 선택으로 여겼다. 6개월 할부! 화끈하게 긁었다.


하지만 일주일 하고도 며칠이 지나면서 고비가 찾아왔다. 오후 4시쯤 머릿속에서 토론의 장이 열렸다. ‘가기 싫다’와 ‘그래도 가야지’의 싸움이었다. 피로함과 배고픔으로 강력한 힘을 얻은 악마가 전적으로 우세했다. 천사의 논리는 오로지 ‘그래도 돈을 냈는데..’뿐이었다.


머릿속이 시끄러우니 화까지 났다. ‘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운동을 가야 하지?’ 결과가 정해진 승부였다. 6시 퇴근 종이 울리자 운동복을 넣은 에코백은 떡볶이 봉투와 함께 나란히 집으로 향했다. 기분 좋게 떡볶이를 해치운 후 밀려오는 한심함과 자책감. ‘좋아 내일은 꼭 운동 가야지, 오늘은 너무 피곤했어.’ 배부른 상태의 의미 없는 다짐으로 죄책감을 덜어냈다. 매번 반복하는 데자뷔였다.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주변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반복되는 걸 수없이 목격했다. 특히 직장인에게는 구전 동화처럼 너무 흔한 이야기다. 죄책감을 느낄 일도, 스스로를 비난할 일도 아니다. 그저 삶을 대하는 생각의 차이가 아닐까.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랴. 지나고 보니, 나를 다그치며 받았던 스트레스는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일 뿐이었다. 가뜩이나 짧은 인생 이런 소소한 일로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다. 21세기의 베토벤이 되겠다는 것도, 머슬마니아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살이 너무 찐 것 같으면 운동을 등록하면 되고, 귀찮을 땐 땡땡이치면 된다. 


그러다가 몸과 마음을 어르고 달래서 헬스장에 발을 디딘 날 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아 한 정거장 전에 내려 조금이라도 더 걸은 날에는 나를 마음껏 칭찬해주면 된다. 칭찬하며 살기에도 모자란 인생, 왜 그렇게 나를 다그치면서 살았을까. 나에게 미안했다.




곧 2021년이 밝는다. 내년에는 피아노 레슨을 등록해야겠다는 행복한 결심에 사로잡혔다. 출석만으로도 폭풍 칭찬을 해준다는 친구의 말이 기분 좋게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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