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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소 Dec 31. 2020

휴가 쓰는 이유를 꼭 말해야 하나요?

프라이버시 존중 부탁드립니다.



“자네는 나한테 휴가 사유를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어.”


띠요옹. 머리 위로 물음표가 한가득 떠올랐다. 말문이 막혔다. 속마음이 말로 튀어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휴가 쓰는 이유를 보고하는 게 직장인의 의무라니?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말이야?’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6월, 한 해의 반이 지났지만 연차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일부러 아끼지는 않았다. 일이 바빠 쉴 생각을 못 했다. 공휴일과 주말 사이 샌드위치 휴일도 아이 있는 직원들에게 양보했다.


쉼 없이 반년을 달려오니 몸이 휴식을 원하던 참이었다. 마침 업무도 비수기였다. 금요일에 휴가를 낸다는 말에 동료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과장님 결재만 남았다.


“이번 주 금요일에 휴가 좀 내겠습니다.”


“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아온 질문. 개인 사유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것저것 하면서 좀 쉬려고요.”


하하, 어색함을 마무리할 웃음까지 붙였다. 이 정도면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충분한 의사표현이라 생각했다.



그때부터였다. 과장님이 집요하게 나의 휴가 사유를 묻기 시작했다. 대답하기 전까지는 자리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하는데?”부터 시작한 추궁은 끝내 “애인 만나?”라는, 나로서는 선을 넘는 곳까지 도달했다.


‘내가 휴가 쓰는 게 싫어서 돌려 말하시는 건가?’


그렇다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해주길 바랐다. (물론 그 날 빠져도 회사에 지장이 없음은 확인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유를 묻는 모습은, 결코 업무나 일정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그저 궁금한 모습이었다. 내가 대답을 안 하니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2년 후 퇴직을 앞둔 과장님으로서는 내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과장님이 살아온 시대는 개인 프라이버시의 경계가 흐릿했으니까. 별 것 아닌 질문을 요리조리 피해 입을 다무는 모습이 탐탁잖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직원이 휴가 쓰는 사유를 상사에게 낱낱이 보고해야 할 의무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사칙에도 노동법에도 없다. 만약 헌법에 있다 해도 프라이버시 침해로 금세 위헌소송에 걸릴 판국이다.


적당히 굽히고 유연하게 대답했으면 넘어갔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재서에 휴가 사유 란이 사라지는 시대에 불합리한 처사라 생각했다.




입사한 지 1년 갓 넘겨 제법 직장인 티가 나던 시절이었다. 만약 그때 적당한 이유를 둘러댔다면 어땠을까? 


지금이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불편한 자리에서 몇 분 동안 실랑이를 하느니, 없는 일정을 만들어 대답하는 게 속 편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네가 너무 뻣뻣했네.’, ‘적당히 둘러대지 그랬어.’ 혹은 ‘그런 걸 왜 궁금해해?’, ‘프라이버시 침해야.’ 등. 어떤 게 정답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윗사람인 상황에서 명확한 기준을 갖게 됐다. ‘선배라는 권력을 휘둘러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을 것.’ 대답하기 싫은 사항을 집요하게 추궁당하는 황당함과 곤혹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후배와의 선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반면교사의 교훈을 준 과장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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