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있어. 엄마 아프잖아. 아빠 밥이 중요해?” 내가 어렸을 적 가끔 편두통으로 고생하는 엄마에게 많이 하는 대사였다. 1남2녀중의 장녀는 그런 역할이다. 엄마의 부재중에는 동생들을 돌보기도 하고, 엄마가 힘들 때 항상 도움이 되는 존재.
초등학교 이후에는 당신이 아픈데도 밥시간이 되면 꾸역꾸역 일어나 밥을 차리는 엄마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당신 입장에서는 그게 당신이 할 일 이었으니 컨디션보다 밥을 기다리고 있는 식구들이 먼저일 것이다.
둘째를 낳고, 3개월만에 한여름에 떨어진 면연력으로 폐렴에 걸린 적이 있었다. 밤새 열은 40도 가까이 나고, 온몸은 근육이 뒤틀리는 것처럼 아팠다. 입원은 못했지만, 수액을 맞고 큰 대학 병원에서 가래 검사를 힘들게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아픈 기간 동안, 남편에게 외식을 부탁했다. 내가 몸이 아픈데도 내 엄마처럼 희생하며 나를 축내고 싶지 않았다. 그 깟 밥 몇 번 사먹는다고 큰일이 나는건 아니니까
이처럼 나는 집안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결혼전엔 살림을 해 본적도 없고, 그저 소꿉장난 같을줄 알았던 일상들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깨끗하기만 했던 집안은 엄마의 부지런한 노고가 녹아 있는 것이었고, 3시 세끼 , 피자 돈가스 모두 만들어 주셨던 엄마의 솜씨로 나의 몸은 튼튼하게 자랐지만, 엄마에게는 회전근 파개근이라는 병을 안겨 주었다.
날이 차가워지니, 양가 어른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횟수가 빈버해 진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30분 거리에 살고 있으나, 무엇이 그리 바쁜지 돌아오는 주말마다 뵙기가 어려운건 사실이다. 이제 70대 줄에 들어서신 부모님들 세대에서의 위의 일화가 당연시 되었다.
돈을 벌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역할,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가정을 리드하는 아빠의 역할.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다른 모습을 보고 자란다. 아침에 바쁘게 같이 나갔다 하교 후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다 저녁 즘에나 부모님을 만난다. 전형적인 맞벌이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다. 이건 아르바이트하는 나에게도 같은 모습을 안겨준다. 사회는 언제나 불안정하고, 내 안에 있는 불안한 마음이 나를 더 밖으로 몰아낸다.
그저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 했던 부모님의 노후는 70대 줄에서는 후회로 남기도 한다. 특히 친정 부모님은 노후비를 깍아서 자녀들을 키우는데 쓰셨다. 물론 감사하지만 그 마음 때문에 지금 마음의 짐이 더해지는 느낌입니다. 내가 원해서 그리 한건 아니고 어쨌든 부모님의 선택 이셨을 텐데 그걸 제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가 편치 않은 거다.
혹자는 말할지 모르겠다. 부모님인데 당연히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당연히 써야 하는데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능력 없는 그저 13년의 전업주부의 발악일지도
사회는 갈수록 살기 좋아지기 보다는 “각자도생”이라는 팻말아래 서로 어딘지 모를 곳으로 그저 달려간다. 나도 그 중에 한사람이다. 얼만큼 달려가야 만족할지 모르겠다. 그저 방향이 틀리지 않기를 기도 할뿐이다.
아직 40대인 내가 70대의 부모님 마음을 어찌 100%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늘 엄마와 통화하다 몸이 아픈 게 짜증이 나신건지, 병원비가 많이 나온 게 짜증나신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런 마음을 토로하신다. 나의 시어머니의 화는 시누이가 친정엄마의 화는 큰딸인 나에게.
엄마들은 왜 아들에게는 이런 걸 안하시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다.
말로는 편해서 그렇다 하시는데, 엄마에게 딸은 그런 존재인가 보다. 때로는 친구처럼 자식처럼 곁에서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 그런데 그런 딸도 마음이 불편할때가 있다. 내가 딱 오늘 그런 날인가 보다. 내가 왜? 도대체 언제까지?
심리학에 보면 ‘투사’라는 단어가 있다. 자기의 안됨을 남탓으로 해버리는거다. 그러면서 거기에 대해 화를 낸다. 화풀이 대상을 찾는 거다. 요즘 묻지마 악행이 많은 이유가 이 ‘투사’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저 안에 녹아있는 화를 밖으로 무차별상대에게 쏟아내는 거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밤을 잘 넘겨 보아야겠다.
오늘이 지나면 나의 다정한 엄마로 돌아오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