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일, 39개국, 세계일주 그리고.
2015년, 매년 높아지고 있으니 당연한 추이라지만 지금껏 가장 높은 실업률을 찍었던 한 해.
공식적으론 청년 열명 중 한 명 꼴로 취업을 하지 못한 실태였고 그나마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이 대한민국 지천에 널려있었을 것이다.
아직 졸업식을 하지도 않았던 2월 1일, 나는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한 재활전문병원으로 사회로의 첫 출근을 했다.
3년제 대학교를 5년 만에 꾸역꾸역 졸업했다.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시절, 다른 친구들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결국은 수능을 망치고 교문을 나서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재수 대신 억지로 선택한 전문대는 집에서 한 시간 반이나 떨어져 있었다.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여서인지 정을 붙이기가 쉽지 않아 겉돌았다.
그런 학업보다 버텨내기 어려웠던 건 직장생활이었다.
전문직종으로 명함을 팠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께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환자를 치료했다. '희생과 봉사'같은 단어에서 묘한 희열을 느끼는 나에게 어느 정도 잘 맞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내’라는 자리에서 내가 겪어내야만 하는 불평등한 일과들과 업무량, 그리고 업무강도에 반비례되는 듯한 낮은 임금은 어렵게 품어낸 보람마저 앗아갔다.
머리와 몸으로 치료하고 나면 마음까지 너덜너덜해져 퇴근을 한다. 집 앞은 치킨 냄새로 가득했다.
한 달에 6번 있는 휴일을 재하고 월급을 계산했을 때, 내가 하루에 버는 돈은 56000원 정도에 불과했다. 오후를 견디기 위해 점심에 먹은 커피 한잔과 출퇴근 차비가 빠지면 50000원이 채 안됐다.
저렴하다며 크게 써 붙여진 치킨 한 마리의 가격은 10000원.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돈을 쓰는 게 무서워졌다.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나가자, 내게 사용 가능한 연차가 생겼다.
실장님은 나에게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연차를 세 개 사용할 수 있고, 1년이 지나면 다음 한 해 동안 6개를 쓸 수 있다고 공표하였다. 사용하지 못한 연차에 대한 수당 역시 없었다. (근로 노동법상 1년에 사용해야 하는 연차는 총 15개이다.)
막내 치료사이기에, 9월의 수요일이나 11월의 목요일 같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어정쩡한 날, 그리고 나는 물론 누구에게도 그다지 의미가 없는 날, 눈치를 보며 나의 귀한 연차를 하나 사용했다.
늦잠을 자고 대충 밥을 챙겨 먹은 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집 앞 카페로 나갔다. 저마다 노트북에, 공책에 머리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파고 있었다. 스펙을 쌓기 위해 공부를 하는 대학생이거나, 고시 등을 준비하는 수험생일 것이다.
다들 열심히 살고 있네, 그래 봐야 별거 없는데.라는 견유적인 생각이 스쳤다.
평일 오후 2시.
카페의 한가운데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시원한 녹차음료를 빨아들이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행복했다.
하루 동안만 치료 선생님이 변경된다는 나의 전달에 불 멘 소리를 늘어놓던 환자분들에 대한 책임감이 배를 조금 울렁이게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이대로 지내다 보면 내 삶은 얼마큼 나아질 것이고, 나는 어떤 삶을 이어가게 될까?’ 같은 유치한 우울이 찾아왔다.
여행을 다녀올까?
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려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작은 사실부터 일상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한 번도 간 적 없는 곳을 찾아가고, 업무도, 공부도 없는 그 홀가분함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공기도, 바람도, 냄새도, 소리도 달랐고 그것은 퍽 낭만적이었다.
어쩌면 청소년도 아닌 것이 외박 금지 집안인 것은 물론, 신데렐라도 아닌 것이 통금까지 있다 보니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에 더 흥분하는 것 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고작 올해 남은 두 번의 연차를 가지고 어디를 갈 수 있을까?
나는 물에 퐁당 빠지고 싶었고, 화려한 도시의 야경 속에 들어가고 싶었고, 뜨거운 사막의 모래 위에 내 이름을 쓰고 싶었고, 드넓은 초원에서 동물들과 뛰어놀고 싶었고, 높은 설산 위에서 라면을 먹고 싶었다.
사실 짧은 국내여행이나 주말여행쯤이야 언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려고 하니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간 내가 가고 싶은 곳들을 다 가 볼 수 있을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다 눈에 담을 것이냐,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유지하며 그 속에서 다른 즐거움을 찾을 것이냐. 하는 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배낭 하나 둘러메고 한 손엔 지도, 한 손엔 빵 하나를 들고 걷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그 그림 속의 나는 나의 삐뚤삐뚤한 아랫니와, 커다란 앞니가 훤히 보이게 웃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일을 그만둬야 하나?
휴학으로 친구들보다 2년 늦게 사회로 나왔다.
경력이 있으니 교육할 필요는 없고, 경력이 짧으니 연봉을 적게 책정할 수 있는 1년에서 3년 차 경력 치료사는 취업이 쉬웠다. 그러니 이 병원에서 1년을 버티면 나는 어떤 병원으로든 이직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한 만큼이나 휴식기간을 가진 치료사 역시 쉽게 취업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두근거리던 마음이 가라앉고 무서워서 배가 살살 아려왔다.
허탈하게 한번 웃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내일을 위해 일찍이 잠에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이 다시 반복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표정 없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부대끼며 출근을 하고, 간단한 청소를 끝내고 치료 스케줄을 확인한 후 온종일 치료를 한다. 고맙게도 일이 바빠 하루가 길지 않다.
그것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뇌졸중 환자 P님은 하루가 다르게 인지가 나빠져갔다. 모두가 다루기 힘들어하던 환자분이셨으니 이제 막 치료를 시작한 몇 개월 차 신입 치료사에게도 예외 없이 버거웠다.
그럼에도 치료사 변경을 원하냐는 팀장님의 물음에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어린 신입 치료사의 패기였으리라.
어제보다 오늘 더, 상태가 나빠져가는 것이 보였고, 그래서인지 내가 맡은 나의 환자 중 특별히 신경을 쓰는 분이었다.
인지치료가 병행되고 계신 분이다 보니 가끔 욕설이나 험한 말을 하시기도 했는데, 그 날은 결국 내 뺨으로 손이 날아왔다. 그걸 보신 실장님께서는 P님께 “김지영 선생님께 어서 사과하세요!”라고 강하게 호통을 치셨다.
악의가 담기지 않은 손짓임을 알기에 사실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네 아버지의 얼굴을 한 P님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사과하세요.”라고 실장님의 말씀을 어수룩하게 반복해 따라 하실 때 한 번, 우리네 어머니의 얼굴을 한 P님의 아내분께서 퇴근하려는 나를 찾아와 눈물을 뚝뚝 흘리시곤 “정말 미안합니다, 선생님.” 하고 말씀하셨을 때 또 한 번, 그리고 한 주 뒤 별안간 재활을 포기하시고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실 때 강하게 한 번 더, 나는 아파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행복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열심히 살았으나 열정 따윈 조금도 없었고, 성실히 살았으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없었고,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있으나 내년의 내가, 미래의 내가 그려지질 않았다.
2015년 12월 바닥까지 얼어버린 한 겨울의 어느 날.
저녁도 먹지 못한 채 병원 스터디를 끝내고 늦은 퇴근을 하던 어느 날.
이 지하철 한 칸 안에서 내가 제일 힘들 것 같은데, 내가 앉을자리는 없었던 어느 날.
참을 새도 없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나와서 급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힐끔거리는 시선을 받아내야 했던 어느 날.
나는 행복하기로 했다.
나는 세계일주를 결심했다.
나는 행복해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