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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Nov 13. 2017

열차 생존기

시베리아, 횡단하기. 9288km.


내가 열차에 올라 탄 이유는, 아니, 내가 러시아로 온 이유는, 그저 '시베리아 횡단열차'라는 단어에 받는 낭만 때문이었다. 애초에 내 여행이 대단한 목적 없이 시작된 걸 생각하면 그것은 아주 타당한 이유였다.


열차는 모스크바 시간이 기준이 된다.

내가 타는 열차는 16:02 에 출발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사실은 다음날 01:02에 출발하는 게 되는 셈이다.


호스텔에서 체크아웃 후 열차시간을 기다리는데 우연히도 내가 타는 '099번 열차'를 운전하는 차장을 만났다.
이 호스텔은 하루 8불짜리 저렴한 곳이었는데, 일주일 동안이나 러시아의 끝과 끝, 그러니까 거의 지구의 4분의 1을 매일같이 오고 가는 사람이 이런 호스텔에 머물고 있다는 데에 적잖이 놀랐다.

그녀는 아쉽게도 오늘이 아니라, 내일 열차를 탄다고 했다.


12시가 넘어가자 주섬주섬 앞 뒤로 배낭을 메고 한 손엔 5L의 물, 한 손엔 라면과 과자 등 일주일치의 식량을 들고 기차역으로 향한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땀이 난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추위에 어쩔 줄 몰라하던 나였다.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고 매섭게 귀와 눈알을 아프게 할퀴어 눈물이 났다.


말이 통하지 않아 몇 마디 나누지 못했던 호스텔의 러시아 할아버지는 굳이 나의 손에서 5L의 물을 빼앗아가듯 들고 기차역까지 배웅해준다. 지하철에서 뵈면 자리를 양보했을 지긋하신 할아버진데, 손목이 아프던 찰나라 거듭 거절하지 못한다.


레일 위에 기다랗게 들어선 기차는 키릴 문자로 깔끔하게 테이핑 되어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타본 여느 기차보다도 좋아 보여 기분이 들떴는데, 기차를 올라타기 위해 제일 아랫 계단 하나를 밟자 철렁. 녹이 슨 파아란 계단이 눌리는 느낌이 좋지 않다.

게다가 열차 문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다는 듯 '끼이잇-'하며 공포영화에 나올법하게 괴상한 비명을 내지른다.


내 자리는 1번.
문 바로 옆자리에 콘센트가 있다고 하여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하기 위해 이 자리를 미리부터 예약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콘센트가 보이지 않는다.
3번 자리에도, 5번 자리에도 없고, 희한하게 7번 자리에 콘센트가 하나 덩그러니 있다.
열차의 모든 시설이 복불복이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콘센트가 앞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었다.

다행히도 5,7번 자리를 사용하는 어르신들의 인상이 나쁘지 않으니 내일 아침 문안인사를 올려보아야겠다.


'아, 이러나저러나 코드를 꼽아놓고 보려 했던 왕좌의 게임은 못 보겠구나. '


자리를 청소하고 옷을 갈아입고 누우니 이미 1시 30분. 기차는 1초의 시간도 용납치 않고 1시 2분이 되자마자 출발했다. 일단 자야 했다.



"언니 열차 안은 덥대요."


내가 열차를 탈것이라 전하자 혜수가 말했다. 그 탓에 열차를 타자마자 반팔로 갈아입고 잠이 들었던 게 화근이 되어, 밤 새 피곤함을 이겨낸 추위에 벌벌 떨다 결국은 일어나 옷을 꺼내 입었다. 돈까지 내면서 받은 이불은 천 쪼가리 한 장이었다. (수건도 겨우 한 뼘이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내키가 160cm인데도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자꾸만 발에 차인다. 키가 큰 러시아 사람들은 이 작은 침대에 어찌 눕는 건지 오지랖에 걱정이 된다. 실제로 침대 밖으로 발들이 많이 나와있다.


딱히 잠을 설친 건 아니지만 9시가 넘어가 눈을 떴다. 어제는 밤이라, 그리고 자느라 몰랐던 것들이 선히 들어온다.
엄청나게 많은 먼지가 부족한 공기 속에 꾸역꾸역 자리를 잡고 떠다니고 있다던지, 대각선 2층 자리에서 시끄럽게 이부자리를 깔던 러시아인이 잘생겼었다던지, 이 낡은 기차는 달리는 동안 신명 나게 몸을 들썩이는 아이였다던지.

기차 직원이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지나간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들고 있던 빵판을 위아래로 작게 흔들며 말을 건다. 러시아말을 알아듣진 못하지만 손을 내 저으며 사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다. 저 돈 없어요.
대신 미리 준비해 온 인스턴트 메쉬드 포테이토와 밥에 물을 부어와 아침식사를 한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다.
기차는 언제 어디서 얼만큼이나 멈추는지, 내 위층엔 사람이 들어올는지, 복도 쪽에 가로로 놓인 쿠셋에 짐이 쌓여있는 걸 보니 저 자리는 예약이 안된 건지, 내가 과연 전기를 얻어 쓸 수 있을지 뭐 그런 것들이 하나도 적립되지 않았다.
서두를 건 없다.

햇빛인지, 바닥에서 반사된 눈빛인지에 밝아진 창가에서 책을 좀 읽자 짧은 오전 시간이 지나간다.

구소련 느낌의 제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러시아말로 말을 건다. 오른쪽엔 총을, 왼쪽엔 몽둥이를 차고 있다. 내 동공이 흔들리자 "티케트, 패스폿." 또박또박 발음한다.


그들은 내게 말을 걸고, 내 여권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내게 티켓을 돌려줄 때까지 단 한 번도 웃어주지 않았다.

뭐 딱히 웃을 이유는 없다만, 왜 사람이 따듯한 남쪽에서 살아야 하는지 좀 알 것도 같다.


 
정차시간의 앞뒤로 10분 정도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귀신같이 그 시간에만 화장실이 급하다. 열차가 출발한 직후부터 화장실 앞에 서서 승무원에게 눈치를 보내는 나에게, 승무원은 눈치를 준다.

기차 3등석은 방 구분이 따로 없이 한 칸 전체가 뚫려있다.
함께 조가 될 6명의 사람들과 신나게 떠들고 싶어 핸드폰자판에 러시아어까지 넣어두었지만 내 조가 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3월의 셋째 주 평일. 비수기였다.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승무원인데 러시아 특유의 무서운 표정과 무서운 말투로 다가가기 쉽지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에게 짜증을 있는 대로 내고, 거치적거리는 이 맨 앞자리 동양인이 귀찮은지 툭툭 치고, 밀치기도 한다.


창밖은 계속해서 눈 투성이다.


'보름달까지는 두밤정도 남았구나.', '유럽은 가고 싶지 않은데.', '이러다 허리 망가지는 거 아냐?'같은 가벼운 생각과,

'다음 달에 있을 내 생일엔 사치를 부리고 싶은데, 이젠 정말로 돈이 다 떨어져 가는구나.', '추억이 눈부시게 아름다우면 살날은 지옥이 될까 천국이 될까.'같은 무거운 생각들을 정리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

나의 한 시절을 쥐고 흔들어대는 이 여행은 대부분 이렇게 무명의 시간으로 흘러가고 있다.


낮잠을 진득하게 자고 일어나니 더워서 땀 흘리던 낮과 다르게 한 밤처럼 한기가 돌아 후드를 주워 입었다.

해가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이내 눈이 쌓인 낮은 동산 뒤로 넘어간다. 눈덩이를 열매라도 되는 듯 우스꽝스럽게 주렁주렁 품은 나무들 사이로 붉은빛이 장엄하다.
하늘이 사실 하늘색만은 아니었다는 걸 절절히 깨닫는 요즘이다.

얕은 불빛만이 복도를 비추고 그마저도 2층 침대에 막혀 나한테 떨어지는 빛이 적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열차 전체를 환하게 비추도록, 불을 켜줄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당장 책을 덮으면 할 일이 없기에 빛을 쫓아 책과 고개를 쭈욱 뻗는다.
이렇게 공부했으면 좋은 대학에 갔겠지.


불이 꺼질 때까지 책을 읽는다.
열차에 불이 들어와 저녁나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다.


하루가 간다.
겨우 두 밤이 지나간다.



다섯 겹이나 껴입고 잠을 잤지만 바람은 기어코 내 살갗으로 파고든다. 밤새 바람과 티격태격 전쟁을 치렀다.

자고 일어나니 시차가 바뀌어있다.


창밖으론 며칠 내 같은 풍경.

러시아의 매몰찬 바람에 해를 향해 뻗어가지 못한 나무들이 더러 누워있다. 물이 얼고 그 위로 내려앉은 눈은 하얗다 못해 빛이 난다.


해가 들이 쬐는 낮시간의 열차 안은 한여름처럼 덥다.
때문에 창밖의 흰 눈은 다른 세상같이 낯설다.

열차가 멈추길 기다린다.
열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고 온 힘 다해 억지로 멈춘다. 고맙다.
앉아있고 누워있는 데에 그다지 좀 쑤심을 모르는 나지만 담요를 두르고 신이 나서 뛰쳐나가 내 키의 세배를 넘긴 나무마저 무릎 꿇게 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바람이 차다. 내 냉장고 바지는 마음과 다르게 바깥공기를 오래 견뎌주지 못한다.

멈출때와 다르게 출발 시엔 기척이 없다. 아마도 이 철마는 달리는 것이 본디 자신의 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옆자리 노부부에게 이스비니쩨와 스파시바, 그리고 몸짓을 섞어 어렵사리 충전을 부탁한 노트북을 자리로 가져와보니 아예 켜지질 않는다.
사실은 언제 망가져도 이상할 게 없는 노트북이었다.
다 벌어지고 들뜬 이 노트북은 두 번째 주인인 나의 말을 잘 듣지 않았을뿐더러, 여러모로 성가신 아이였다.
그 아이가 죽었다.
바닥에 내던진 후 발로 밟는 것으로 장례를 치러주어야겠다.

초콜릿 하나를 꺼내 먹으며 어제 다 읽은 책을 다시 뒤적인다.


"만약 네가 힘들고 외롭다면,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야."

밑줄도 그어본다.



원래 건성인 나는 머리에 잘 기름이 끼지 않아, 열차 안에서 절대로 머리를 감지 않으려 했건만 눕기만 하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냄새와, 밤이 깊으면 창가에 비치는 추잡한 몰골에게 패배해 오늘은 머리를 감기로 한다.

변기와 작은 세면대가 손을 잡고 있는 아주 작디작은 꼬리칸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기 위해선 페트병이 필요하다.
수건은 그나마 가장 깨끗해 보이는 휴지 위에 떨어지지 않게 올려둔다.
가져온 페트병을 수도꼭지에 끼워 넣고 물을 받는다.
티셔츠는 바지 안으로 야무지게 쑤셔 넣고 허리를 숙인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물이 빗물에 걸레를 빤 것 같은 검은 물이니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허리를 숙일 때 다리가 지저분한 변기에 닿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것.
참고로 투명한 페트병에 담기는 물의 자태를 보고 난 후엔 매일 하던 세수와 양치질에 거부감이 든다. 그럴 땐, 눈을 감자.(오래 정차한 역을 출발하자마자 화장실을 가면 물이 깨끗한 듯하다.)

무튼, 반쯤 받아진 페트병 속 물을 머리에 부어가며 한 손으로 열심히 감으면 된다.
오랜만에 머리를 감아서인지 머리카락이 반절은 뽑힌듯하다. 게다가, 깨끗해진 걸까 더 더럽힌 걸까 하는 마음도 든다. 괜찮다. 일단 냄새는 면했다.


남은 식량을 계산해보니 한참 모자라다. 기차역에 자리한 간이매장들은 가격이 엄청나다. 식사를 줄여야 했다.


시차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시간표를 알아보기 힘들어지자 시계를 모스크바 시간으로 아예 맞춰놓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새벽 4시였다. 아마도 6시나 7시쯤 되었으리라.
채 지지 못한 반쪽짜리 달이 나에게 모습을 들켜버렸다. 분홍색 구름은 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감처럼 예쁘게도 번져있다.

마지막 잎새조차 허락하지 않던 얄따란 나무들이 이제는 제법 무성하다. 조금 따듯해지는 걸까. 했는데, 열차가 멈췄을 때 뛰쳐나가 보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추위다.

나랴흐는 숨을 크게 몰아쉬는 사람이었지만 고맙게도 서양인에게 나는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는 겨우 두정거장을 함께 간 19세 청년으로, 나의 첫 번째 짝꿍이었다.
내 나이를 듣고는, 한국말로 '18살 같아.'라고 적힌 번역 어플을 내게 보여줬다. 뿌듯했다.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는데, 번역기와 바디랭귀지를 이용해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게 꽤 흥미가 있어 보였다.


"한국에서 사는 건 어때?"


"한국은 이렇게 춥지 않아서 좋아."


"지금은 3월 말이잖아. 하나도 안 추워!"

그는 허세 가득하게 웃었다.


나에게 무어라도 주고 싶었던 그는 비록 먹던 것이지만, 초콜릿을 세 개나 주었다.

그리곤 두 정거장 후, '썅큐'라며 할 줄 아는 유일한 영어를 내뱉고 떠나갔다. 안녕.

두 번째 짝꿍은 뒷모습이 예쁜 러시아 아가씨였다.
오자마자 러시아말로 사정없이 대화를 시도하던 그녀는 "러시아말 못 해요~까레이.(코리아)"라고 했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남자친구를 역전에 두고 온 그녀는 남자친구가 배웅 후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주 밝아졌다.

번역기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나와 말하고 싶지 않아 보여 포기했다. 그녀는 내가 자고 있는 새벽, 인사도 없이 떠나갔다. 안녕.


이 후 몇정거장씩 기차를 타는 나의 숱한 짝꿍들이 오고갔다.

그들은 모두 영어를 못했고, 항상 노쓰코리안이냐 물었다.




마지막 날 눈을 뜬 것 역시 새벽 4시. 이제 일곱 차례나 바뀌던 시차의 종착역이다.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시각이었다.


늦은 밤보다 이른 아침을 더 좋아하는 나는 열차가 멈추자 밖으로 기어나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조금 걸었다. 모스크바까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침대 아래에서 가방을 꺼내 하나씩 정리했다. 7박 7일의 기차여행이 끝이 나는 중이었다.

광활한 얼음밭을 보며 글을 쓰고, 막힐 때는 드라마, 영화를 보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내 자리에 콘센트가 없는 것이 시작이 되고, 노트북이 사망한 것이 끝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대단할 것도 없었지만, 대단했던 작은 것들의 집합소.
막연히 궁금했던 기차여행이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장렬하게, 또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무척 편안했는데 왠지 고생을 끝낸 것처럼 홀가분하다. 겨우 일주일이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그리웠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라면과 인스턴트 감자, 전투식량, 군것질이 아닌 식당밥을 먹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새사람이 된 기분까지 드는 것이 어쩌면 내가 찾던 횡단 열차의 목표는 벌써 달성되었는지 모른다.

빠까 시베리아, 빠까 횡단열차. 스파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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