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을 각오
나는 세계일주를 다녀왔다.
고작 1년 반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내 20대의 삶을 나타내기 딱 알맞은 문장이다. 세계일주 전에도 1년에 두어 번 정도 해외여행을 다녔다. 대학생 때는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세계일주 후에는 광주광역시에 사는 남자친구와 주말마다 국내 여행하듯 여러 지역에서 만났다. 술도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나에게 여행은 유일한 취미였고 숨통이었다. 20대의 끝자락에 코로나가 터졌고, 나의 숨통도 막혔다. 하지만 이후로도 마스크를 착실히 끼고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가며 국내여행을 다녔다.
결혼을 하고 우연한 기회로 강아지 두 마리를 입양하게 되면서 나는 활력을 잃었다. 출근시간보다 훨씬 여유롭게 일어나 아이들 산책을 시키고, 아침밥을 먹였다. 출근하면서 노즈워크를 쫙 깔아 두면 퇴근 후 돌아와 그 노즈워크를 하나씩 주워 다음 날을 위해 다시 채워 넣었다. 원래 여유롭게 출근을 했었던 나지만 아이들과 최대한 오래 있고 싶어 아침마다 달려가서 지하철을 탄다. 업무 중에는 늘 홈캠 화면을 휴대폰에 켜 두었다. 문득 생각이 나거나 모션이 감지될 때 화면을 확인했다. 퇴근 때 역시 사무실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 역까지 달려간다. 그 시간에 들어오는 급행열차를 놓치면 집 도착까지 15분이 늦어진다. 아이에게 15분은 나에게 1시간 정도로 체감되는 수준일 터였다. 그러니 퇴근 후 저녁 약속은 잡을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면 사방에 폴폴 날리는 털을 한바탕 치우고 저녁밥을 먹여 산책을 나간다. 돌아와 발을 닦이고, 양치를 시키면 그제야 하루 중 유일하게 나를 위한 시간이 오는데, 넷플릭스라도 한 편 보려 하면 아이들은 시끄럽게 으르렁거리며 얼싸안고 저녁 산책의 회포를 푸느라 집중이 되질 않는다. 만저달라고 달려와 안기고 나를 손톱으로 긁었다. 매일이 놀라울 만큼 피곤했다. 당연히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나는 나를 잃었다.
평일에는 두 아이가 하루 종일 집을 지켜주기 때문에 주말에는 아이들끼리 두고 싶지 않다.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웬만하면 약속도 잡지 않았고, 함께 갈 수 있는 애견 운동장 위주로 외출을 했다. 아이들을 입양한 후 남편과는 단 한 번도 영화관에 가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애견 동반이 불가한 곳에서) 외식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를 잃었다.
이런 노력에도 아이들은 심심해했고, 매 순간 보호자를 그리워했다. 아주 잠깐의 외출-쓰레기를 버리고 오거나 우유 한 팩을 사 오는 정도의 짧은 외출-에도 서러워했다. 한참 잠든 새벽에 잠깐 목이 타 깨면 내 눈동자가 반가워서 아이들은 허리를 흔들어재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출근은 물론, 생활에 필요한 짧은 외출도, 어쩌면 상대적으로 조금은 긴 밤잠도 나는 늘 미안해야 했다.
사람은 자란다. 언젠간 기저귀를 때고 두발로 걷는다. 적당히 자란 후엔 내가 없을 때 라면이라도 끓여먹고, 치킨이라도 시켜먹는다. 그것도 어렵다면 오늘은 약속이 있으니 평소보다 조금 늦는다는 의사라도 전달해줄 수 있다. 하지만 강아지는?
반려동물은 귀엽다. 귀여운 건 세상을 구한다. 아파트를, 지구를 부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만 그에 따른 책임감은 또 다른 문제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견생을 평생 책임지겠다면 이제 아이를 입양할 준비가 된 것이다.
나는 커리어와 노후를 위한 적금을 포기하고 세계일주를 떠나라고 추천한다. 세계일주는 어떠한 이력서도 채울 수 없고 내 미래를 풍족하게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추상적인 것을 남긴다. 빛이 나는 추억은 지금의 무료함을 견디게 하고, 자존감을 올려주고 책임감을 배운다. 세계일주를 통해 남은 것은 반려동물이 내게 남긴 것과 비슷하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유행하는 옷도, 비싼 밥도, 멋진 장난감도, 길고 긴 산책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함께하는 시간만을 원한다. '나'자체를 아무런 조건 없이 원하는 것. 그것은 아무에게나 받을 수 없는 비교 불가한 큰 사랑이다. 그리고 그 경험 또한 나를 살게 한다. 그렇기에 나는 충분한 고민과 충분한 마음이 있다면 한 아이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해지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평생 크지 않는 갓난아이를 키우는 기분이 들 수 있다. 인간의 언어를 완벽히 알아주지 않는 아이들에게 실망할 수 있고, 버겁고, 힘에 부칠 수 있다. 하지만 오직, 딱, 당신만 필요한 아이를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받는 기쁨을 온전히 느껴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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