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대학로입니다. 대학교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온 대학로예요. 일주일 전 우연히 보게 된 마로니에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태아 정기검진날이라서 마침 연차를 낸 날입니다. 9시에 병원진료를 갔는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여태 잘 있었는데 오늘 보니 역아가 되어 있어서(머리가 아래를 향하지 않고 다리가 아래로 향한 자세) 조금 속상한 마음이었습니다. "채호두, 다음 정기검진 때까지 다시 올바른 자세로 있는 게 좋을 거야." 처음으로 호두에게 성까지 붙여서 부르며 배 속에 아기에게 으름장을 놓았어요.
진료를 마치고 11시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로니에 공원 곳곳에서 자기만의 자세로 앉아 글을 쓰고 있었어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2시까지 제출이라서 3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서둘러 현장접수를 하고 안내서와 원고지를 받아 들었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 속에 빈 공간을 찾아 겨우 자리를 잡았습니다. 글은 당일 공개된 네 가지 글제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작성하는 것이었어요. 공개된 글제를 보고 저는 상당히 당황해서 한 동안 멍하게 서 있었습니다.
글제는 '삐에로, 안경, 쓰레기, 달콤' 네 가지였어요. 여성만 참가할 수 있는 백일장인만큼 뭔가 여성과 관련된 키워드일 거라고 예상했었는데요. 그런 저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린 글제였습니다. 삐에로에 쓰레기라니. 정말 신박한 단어들이었습니다. 고민도 잠시. 저는 '달콤'이라는 글제를 선택하고 제가 가진 경험에 녹여 글을 써내려 갈 수 있도록 미리 생각해 온 경험담과 저의 소재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개요를 잡고 본격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보통 브런치에서는 1,500자 정도의 글을 써왔는데요. 이번 백일장에서는 4,000자 원고지를 채워야 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4,000자는 긴 글이었습니다. 노트북으로 열심히 글을 써 내려갔고 생각보다 촉박한 시간 속에서 수정할 틈도 없이 바로 글쓰기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손으로 글쓰기라고는 가끔 쓰던 일기밖에 없었던 저에게 원고지에 손글씨로 4,000자를 옮겨 적는 것은 생각지 못한 변수였습니다. 적어도 1시간 30분은 걸릴 거라는 예상하에 12시 30분쯤 서둘러 글을 마무리하고 완성한 글을 원고지에 옮겨 적기 시작했습니다. 백일장 대회인 만큼 2시가 지나면 글 접수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꾹꾹 눌러 정성스럽게 쓰던 글자들이 중간도 채 되기 전에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나무처럼 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학창 시절 이후 오랜만에 원고지에 글을 쓰는 탓에 숫자는 한 칸에 두 개를 적는 것인지, 따옴표 다음에 한 칸을 띄는 것인지 기본적인 것들 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처음 세네 장을 쓰면서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아니, 원고지에 손글씨 쓰는 거 엄청 오래 걸리는 일이잖아! 이거 2시까지 완성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글을 쓰면서도 남편에게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지금 몇 시예요? 지금 내가 전체 글의 몇 프로 정도 쓰고 있어요? 내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손으로는 계속해서 글을 쓰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쉴 새 없이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안 되겠어요. 여기서부터 읽어줘요. 받아쓰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열심히 읽어주던 남편은 갑자기 말했어요.
"여기서부터는 애지가 보고 써요. 나는 가서 줄 서 있을게요!"
뒤를 돌아보니 접수를 위해 많은 인파가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자 마음은 더욱 급해졌습니다. 4,000자에 맞춰 완성했던 글은 다 쓰고 나서는 원고지의 4장이나 남게 되었습니다. 시간 안에 다 쓰지 못할 까봐 불안한 마음과 행여나 분량이 넘쳐 원고지에 다 담지 못할까 걱정 어린 마음에 줄여서 쓴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습니다.
촉각을 다투며 겨우 완성한 원고지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으로는 만삭이 된 아랫배를 받치고 남편이 서 있는 줄을 향해 뛰었습니다. 그렇게 겨우 완성한 글을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글을 접수하고 나자 온몸에 피로가 몰려왔어요. 어깨도 아프고 눈도 풀려버렸습니다. 3시간이 부족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카페에 앉아 한숨 돌리며 줄을 돌아봤는데 2시가 넘어 10분이 되어도 접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10분이라도 더 쓸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습니다.
남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여보, 도와줘서 고마워요. 여보 아니었으면 혼자서는 못 해냈을 거예요."
마음의 긴장이 풀리자 백일장 안내서에 적힌 상금이 보였습니다. '1등 500만 원'
와. 1등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상금도 좋지만 이런 글짓기 대회에서 학창 시절 이후 처음으로 상을 받는다는 사실에 참 기쁠 것 같습니다.
수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2025년 10월 29일.
차가운 바람이 무색하게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초 겨울 속에서도 따스함을 느꼈던 오늘.
어른이 되고 글쓰기를 좋아하면서 용감하게 글짓기 대회에 도전한 나 자신에 대한 기특함.
그리고 곁에서 저를 도와주며 함께해 준 고마운 남편.
남편과 연애 시절, 데이트 할 때 먹었던 카레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먹은 시간.
스타벅스에서 피곤해 잠든 남편 곁에서 글을 쓰는 이 시간.
오늘 하루의 행복함은 마음속 깊이 남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4시 10분입니다. 5시에 시상식을 시작한다고 하니 남은 50분 동안은 1등 하면 어떤 소감을 말할지, 500만 원이라는 돈은 어떻게 사용할지 행복한 상상에 마음껏 빠져봐야겠습니다.
사실 소감은 한 마디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저의 인생 여정을
항상 함께해 주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수상의 영광과 기쁨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