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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관 시술을 했어요. ep6

두 번째 이식

by 애지

4월 8일 화요일.
이 날은 정말 흔치 않은 날이었습니다. 좋지 않은 의미로요. 저희 회사는 자율근무제 시간 선택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2시까지 이식하러 가기 위해서 8시 30분 출근, 오후반차를 계획했어요.

12시 30분 퇴근 후 점심 먹고 병원에 가면 딱이었습니다.


완벽한 계획을 꿈꾸며 8시 30분까지 회사에 와서 컴퓨터를 켰는데, 근무 시간이 아니라고 뜨는 게 아니겠어요? 순간 아찔했습니다. 확인해 보니 평소 10시 출근하는 설정을 그대로 두고 출근 8시 30분으로 변경해두지 않은 것이었어요.


아마 모든 것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멘붕에 빠져서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화해서 물어봤어요. 일단 인사팀에 전화해 보니 방법은 연차를 내는 것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전화해서 3시로 미룰 수 있는지 물어보니 배아 해동 등에 대한 타이밍으로 인해 시간 조정은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어쩔 수 없이 오후반차를 연차로 변경해 올리고 일단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갔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매일 저녁 충전해 두는 휴대폰을 어제 따라 충전해두지 않아서 배터리는 12%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현대인들이라면 배터리 12%가 얼마나 큰 불안감을 주는지 아실 텐데요. 더군다나 엄마가 10시 10분까지 제 마중을 나오기로 하셨는데 배터리가 꺼지기 직전까지 되어서 더 이상의 연락은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회사로 오는 기대로 가서 타면 평소 내리는 역이겠지 하면서 마침 도착한 지하철을 탔어요. 그리고 한참을 가다가 반대방향으로 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번뜩 눈을 뜨며 내린 역은 성수역이었습니다. 마침 내린 곳 바로 앞에 반대로 가는 지하철이 있길래 번거롭게 갈아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지하철을 탔어요. 휴대폰이 꺼져 있으니 그저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바라보고 평소에는 눈길도 안 갔던 지하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따뜻한 봄이 왔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제가 내린 곳에서 앞에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은 당연히 잠실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용답이었습니다? 엥? 진짜 그때는 화도 안 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와본 용답역에서 내려 다시 반대로 편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습니다. 잠실로 한 번에 가는 건 없고 성수에서 또 갈아타야 했습니다.


결국 환승 없이 한 번에 20분이면 가는 집을 총 4번의 환승을 하며 거의 1시간 30분이 걸려서 도착했습니다. 10분부터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와있던 엄마는 폰 연락도 되지 않고 20분이나 늦은 저를 기다리며 큰 걱정을 하셨어요.


여차저차 엄마를 만나서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평일 런치세트를 먹어야겠다며 외식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평일 낮시간에 볼 수 없던 햇살에 반짝이는 이쁜 벚꽃과 개나리도 실컷보고 집에 거의 도착한 주차장에서 사건은 발생했습니다.


쾅. 엄마가 엑셀을 잘못 밟으셔서 벽을 친 것이었어요. 엄마는 30년 넘도록 무사고에 완전 베테랑 운전자이십니다. 좀 전에 식당에서도 엄청나게 어려운 주차를 해내는 엄마를 보시고 주차요원도 깜짝 놀랐었거든요. 그런데 엄마의 첫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엄마아! 하고 소리치는 사이에 이미 벽을 쾅 박은 이후였어요. 와. 엄마의 30년 무사고를 처음 깬 날이었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진 안았지만 차가 많이 다쳤습니다. 차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차에게도 첫 사고사였어요. 그래도 타인과의 사고가 아닌 벽을 친 사고라는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식한 후가 아니라 전이라는 것도 정말 감사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와.. 오늘 진짜 집에 가서 가만히 얌전히 있고 조심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낮을 자고 다시 남편과 병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차를 타고 가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지하철을 탔어요. 어차피 걷는 게 더 좋기도 하고 차도 안 밀리고 한 번에 금세 가니까 좋은 선택 같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하고 항상 친절하고 따뜻한 의사, 간호사분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이식을 잘 마쳤습니다. 지난번 채취했던 5일 차 배아 두 개였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저의 무릎을 탁 안으시며 이식 너무 잘 끝났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어요. 그 모습이 맑고 순수해 보였습니다. 저보다 더 파이팅을 많이 외쳐주시는 고마운 의사 선생님이었어요.


이식이 끝난 후 주는 두유와 검은콩 떡을 맛있게 먹고 수납을 했습니다. 지난번 검사비용 80여만 원에 약국 가서 약을 짓고 나니 약값도 18만 원이 넘게 나왔습니다. 와우... 아니 나라에서는 저출산으로 난리라면서 이렇게 지원도 적다는 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남편에게 오늘 하루 지하철 잘못 타서 집 오는데도 한참 걸리고 폰 배터리도 없어서 꺼지고 차 사고까지 왜 이럴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어요. "가장 중요한 일 잘 끝냈으면 됐죠."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큰 일들도 아니고 오히려 큰 사고들이 아니었으니 다행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남편과 한숨 자고 일어나 먹고 싶었던 삼겨살을 먹으려는데 아빠가 보이스피싱으로 폰이 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빠 친구분이 카톡으로 청첩장 링크를 보내서 눌렀는데 누르는 동시에 프로그램이 깔리면서 아빠 정보를 털어간 것이었어요. 이런 사기에 안 넘어갈 사람이 있을까요. 아빠 친구분께 확인한 결과 그런 링크를 보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아빠 친구분이 카톡을 피싱당해서 그 지인들에게 링크를 보낸 것이었어요.


다행히 금전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아빠께서는 무척 많이 놀라셨습니다. 휴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하루였어요. 그렇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무사히 잠에 들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하루였어요.


그래도 남편 말대로 어제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이식을 무사히 잘 마쳤으니 그걸로 되었습니다. 이제 검사일까지 열심히 제 몸을 돌보면 되는데요. 다음 검사일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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