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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희 Oct 17. 2019

오늘의 퀴즈, 당근 김밥 그리고 당근 잎 부침개

존중의 식탁

비건이 되기로 마음먹은 후, 내 일상엔 퀴즈가 꽤 자주 등장한다.


Q) 초대를 받았는데 직접 길러서 마련한 염소 고기 스튜가 메뉴로 나왔다. 최소한 공장식 축산의 고기는 아니니 먹어도 될까?

Q) 고기는 먹지 않더라도 소스나 같이 끓인 채소만 건져 먹어도 될까?

Q) 직접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이 들어간 타르트가 상에 나왔다. 먹어도 될까?

Q) 아보카도가 들어간 맥도널드의 샐러드를 먹는 게 나은가, 친구가 싸 온 유기농 달걀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는 게 나은가?


모두 애매한 경우들. 만약 이 상황에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나 혼자라면 거의 고민 없이 동물성 제품이 들어갔을만한 음식은 먹지 않는다. 스스로 정한 기준을 쉽게 넘어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보는 눈이 많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나 은근히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면 답은 쉽지 않다. 김한민 작가님의 <아무튼, 비건>에 나오듯, 한 사람의 완벽한 비건을 만드는 것보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비건 지향적인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는 게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난 ‘완벽주의자’ 느낌이 나는 비건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중이다. ‘저렇게 피곤한 일을 왜 하는 거지? 난 저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 같은 생각이 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 정도면 먹고사는 데 크게 불편함은 없네? 나도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게 목표라면 목표다.


그래서 평소의 기준은 비건이되, 선택지가 불가한 사항에선 고기와 함께 조리된 채소만 건져먹는 걸로 타협한다(만약 요리하는 사람이 따로 채소 접시를 마련해줄 것을 제안하면 감사히 승낙한다). 음식을 두고 저울질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지만, 탄소발자국을 가득 남긴 아보카도가 들어갔고, 환경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대형 체인점의 음식을 먹느니 고통이 최소화된 달걀을 먹는 편을 택한다. 대신 육고기는 먹지 않는다. 내 최후의 기준점은 이런 것이다. 내 손으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은 먹어도 된다. 직접 닭을 키워 달걀을 마련하는 건 할 수 있지만, 염소의 목을 따서 가죽을 벗겨내 고기를 마련하는 일은 못 한다. 먹고 싶다면 내가 하기 싫은 이 과정을 다른 이에게 떠넘겨야 한다는 의미다. 내겐 동물들의 권리도, 환경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일도 무척 중요하다.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이 다른 이들에게 편할 리 없다.


동물도, 환경도, 사람도 존중하는 식탁은 소농에게서 직접 구입한 채소로 차린 식탁일 것이다. 산책하다 만난 이웃에게서 큰 당근을 두 개 얻었다. 집으로 돌아와 당근 뿌리로는 간단 김밥을 말고, 잎으로는 전을 부치고, 껍질로는 채수를 우려내 된장국을 끓였다. 당근 두 개로 풍성하고 존중이 가득한 식탁이 차려졌다. 내일 산책길엔 직접 만든 쿠키를 몇 개 가지고 가서 나눠 드려야지.


‘오늘의 퀴즈, 당근 김밥 그리고 당근 잎 부침개’


재료 : (2인분) 잎이 붙어있는 당근 한 개, 양파, 생강, 밥, 김, 밀가루


먼저 김밥을 말자. 당근 껍질을 벗긴다(벗긴 껍질은 채수 내는 데 쓰면 좋고, 싱싱한 당근이면 껍질을 벗기지 않고 솔로 문질러만 줘도 된다). 곱게 채 썬 다음 볼에 넣고 소금을 조금 넣어준다. 그다음 강판에 생강을 갈아준다. 생강 향을 좋아하면 많이 넣어도 되지만, 당근 하나당 반 티스푼 정도면 충분하다. 채 썬 당근에 생강즙을 넣고, 식초도 조금 넣어준다. 맛이 배어들도록 잠시 둔다. 기다리는 동안 밥에 간을 하자. 이 김밥은 초밥처럼 만들면 좋으니 참기름 대신 식초와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게 좋다. 당근에 물이 조금 생겼으면 물기를 꼭 짜준 후 김밥을 말아준다.


이제 부침개 부치자. 당근 잎은 먹을 수 있는데, 생으로 먹으면 식감이 거칠다. 갈아서 페스토를 만들거나 전으로 부쳐 먹는 걸 추천한다. 잎을 깨끗이 씻고 3~5cm 길이로 숭덩숭덩 썰어준다. 양파 반 개도 얇게 채 썬다. 볼에 먼저 밀가루와 소금을 조금 넣은 다음 물을 조금씩 부어서 섞어준다(밀가루의 양은 채소의 1/3 이하가 적당하다). 좋아하는 식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숟가락으로 들어 떨어뜨릴 때 주르륵 흘러내리는 정도의 농도가 좋다(콩국수 국물의 농도랄까). 반죽에 채소를 넣고 잘 섞어준 후, 열심히 부친다.


김밥은 초밥처럼 고추냉이 간장에 살짝 찍어 먹어도 맛있다. 포인트는 생강즙. 속 재료라곤 당근밖에 없는데도 생강 덕분에 무척 풍부한 맛이 난다. 볶지 않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하게 김밥이나 말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메뉴. 쑥갓 비슷한 향이 나는 당근 잎 부침개와 가벼운 된장국과 함께 향긋한 식탁을 즐겨보자.


(주의. 당근 잎은 자궁 수축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임신 중인 여성에겐 권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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