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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희 Oct 15. 2019

크리스마스 같은 사과 말랭이

향기 나는 과자 이야기

비건이 되기로 마음먹으면, 먹을 수 없는 게 많아진다고 한다. 이건 사실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다. 외식을 하기엔 선택지가 너무 적으니 저절로 집에서 밥을 챙겨 먹게 된다. 자연스레 요리와 건강에 관심을 가지니 이런저런 새로운 레시피들을 시도할 기회가 많다. 어제 남자 친구의 누나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아주 잘 먹고 산다니까? 고기 안 먹은 지 몇 주는 되었는데 전혀 이상함을 못 느끼겠어. 재료도 레시피도 향신료도 다양하게 돌려가며 요리하니까 더 잘 먹는 것 같아.” 아마 누군가가 내가 채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누나의 식탁을 걱정해준 모양이다. 


정말이다. 요리를 공부했지만 귀찮아서 새로운 레시피를 찾아 시도해보는 일이 잘 없던 나였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매 끼니 비건 요리책을 찾아보며 내가 가진 재료로 비슷하게 만들어보는 데 재미 들렸다. 한식, 프랑스식, 동남아식, 중동식...... 거기에 베이킹까지. 식비도 아주 적게 든다. 토요일마다 시내에 나가서 장터와 마트에 다녀오는데, 10만 원 내외로 장을 봐 오면 일주일 내내 세 명이서 아주 풍요롭게 먹는다(맛 좋은 와인 세 병과 맥주 6병들이 3팩도 포함한 가격이다). 비건임에도, 아니, 비건이어서 식비가 적게 드는 이유 중 하나는 군것질거리를 거의 사지 않기 때문이다.


비건이 되면 먹지 않는 식품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건 과자다. 시중에 나와있는 대부분의 과자를 안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쿠키에는 버터, 마시멜로우에는 가루우유, 헤이즐넛 초콜릿에는 우유(다크 초콜릿 제외), 초코바에는 버터 캐러멜. 감자칩 같은 칩 종류는 대부분 먹을 수 있지만 팜유를 쓰는 경우가 많아서 최대한 먹지 않는다. 대신 아몬드나 호두 같은 견과류를 사 와서(최대한 포장이 적은 제품) 유리병에 한가득 넣어두고 저녁에 수다 떨며 야금야금 집어먹는다. 그래도 뭔가 다른 군것질거리가 있었으면 싶다. 그러고 보니 이웃집에서 나눠 준 못생겼지만 꽤 달콤한 유기농(집 마당에서 바로 딴 사과다) 사과가 많이 남았지. 칩, 말랭이를 만들자.


동그란 사과 편이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보고 일을 다녀온 남자 친구의 누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리스마스 같아!” 아닌 게 아니라 사과 말랭이를 만드는 며칠 동안 집 안은 무척 예쁘고 향기롭다. 사과가 말라갈수록 향이 더 진해진다. 장식과 방향제용으로 일부러 말랭이를 말려도 괜찮겠다. 사과 모빌 아래에서 차 한잔 나누며 몸을 녹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림 같다.      





‘크리스마스 같은 사과 말랭이’


재료 : 사과, 빨랫줄 혹은 긴 대나무 혹은 커튼 봉, 실, 사과 뚫는 도구 혹은 젓가락, 텔레비전 혹은 오디오

이건 딱히 특별한 기술이나 재료가 필요한 게 아니다. 다만 약간의 인내를 필요로 한다. 텔레비전 틀어놓고 콩나물 다듬듯 좋아하는 예능이나 음악 앞에 앉아 준비하자. 사과 양에 따라 다르지만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릴 수도 있다(난 사과 여덟 개 정도를 만드는 데 1시간 정도 걸렸다). 


우선 사과를 자른다. 기다란 사과 중심 뚫는 도구가 있다면 먼저 뚫어주고, 없으면 바로 편을 썬다. 사과의 중심 부분이 가운데로 오도록 가로로 얇게 썬다(두께 약 3mm). 조금 더 두꺼워도 상관없지만 마르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다 썬 사과를 따로 접시에 담아둔 후, 실을 준비한다. 1m 정도의 길이로 실을 미리 열 개쯤 잘라둔다. 이젠 단순노동의 시작이다. 사과 뚫는 도구로 미리 뚫어둔 구멍으로 실을 천천히 묶어준다(미리 뚫어놓지 않았다면 젓가락으로 실을 함께 밀면서 통과시킨다). 줄 하나에 사과 편 대여섯 개를 매달 수 있다. 사과 편 하나 묶고, 약 8cm 여유를 둔 자리에 다시 묶기를 반복한다. 끝부분엔 실을 15cm 이상 남겨두어야 나중에 매달기 편하다. 


단순노동이 끝났다면 매달 곳을 준비하자. 천장이나 벽에 빨랫줄이나 대나무 봉을 매달 곳이 있다면 좋겠지만 없다면 커튼 봉을 활용해도 괜찮다. 커튼을 걷고 넓은 부분을 마련해둔다. 이제 며칠간은 사과 말랭이 커튼이 걸릴 예정이다. 방 중간으로 빨랫줄이 지나가게 걸었다면 최대한 밑으로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말랭이를 매단다(아니면 애초에 짧은 줄에 사과 3개 정도만 매달아도 괜찮다). 준비해둔 사과 편들을 가지고 와서 두 번 매듭지어 달아 준다(꽉 달아줘도 괜찮다. 후에 제거할 땐 칼이나 가위로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사과 편들 이 달라붙지 않게 사이사이에 적당히 여유를 둔다. 뒷정리를 마친 후 예쁜 사과 커튼의 모양과 향을 감상한다. 


말랭이는 방 온도에 따라, 습도에 따라, 편 두께에 따라 다르지만 일주일 정도 느긋하게 두면 완성된다. 만져서 살짝 눌러도 건조하면 말랭이를 쭉 찢어서 실에서 빼낸다. 밀폐용기에 담아 보관한다. 나는 사과 껍질을 그대로 썼지만 말랐을 때 약간 질긴 식감을 싫어한다면 껍질을 벗긴 후 만든다(대신 사과 편이 힘이 없어서 만들 때 조금 불편하다). 과정이 조금 지루하고 귀찮지만 일주일 동안의 아름다움과 향, 그리고 그 후의 맛까지 즐길 수 있는 풍족한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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