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우유를 요리에 썼다.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는 루(버터와 밀가루를 함께 볶은 것. 난 식용유와 밀가루를 썼다)에 우유를 부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평소라면 당연히 두유를 꺼내와서 좌륵 부었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냉장고 문짝에 자리 잡은 우유팩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얼마 전 조카가 와서 시리얼에 부어 먹고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우유. 나는 물론이고 다른 식구들도 우유를 먹어 버릇하지 않아서다. 가끔 이렇게 요리에나 쓰는데, 요즘은 주로 내가 요리를 하니 자연스레 열린 우유 팩은 방치되었다. 언제 다시 조카가 와서 시리얼을 먹을지 모른다, 그럼 저 우유는 곧 상해서 버려야 한다. 우유를 먹는 건 내키지 않지만, 멀쩡한 음식을 제대로 소비하지 못해 버리는 건 더 싫다. 결국 우유 팩을 열어 맛을 확인한 후 냄비에 전부 쏟아부었다.
탕수육 소스에 전분 물 풀어 넣듯 꾸덕하고 푸근한 음식을 만들 때 프랑스에서 자주 쓰이는 베샤멜소스(우리가 잘 아는 경양식집 레스토랑 크림 수프의 원조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레시피는 냄비에 버터를 녹인 다음 밀가루를 넣고 볶아준 후 우유를 가득 넣어 걸쭉해질 때까지 끓인다. 그러니 베샤멜소스는 비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이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어차피 소스를 걸쭉하게 만드는 역할은 밀가루다. 버터 대신 식용유를, 우유 대신 두유를 넣어도 꾸덕한 소스를 만들 수 있다. 소스에 후추와 넛맥을 조금 넣어주면 어지간한 미식가 아니고서는 오리지널과 구분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러니 굳이 필요하지 않은 우유를 넣어 소스를 만들곤 차근차근 라자냐 구울 준비를 했다. ‘이 라자냐에 우유가 들어갔다고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역시 우유가 들어가서 맛있네 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혼자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오븐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식탁을 차리고 한 조각씩 덜어 입에 넣자마자 모두의 눈이 반짝반짝한다. “수제 라자냐 정말 오랜만이다! 흐음 맛있어.” 일반적으로 라자냐를 만들면 라자냐 면엔 달걀이 들어가고, 베샤멜소스엔 우유와 버터가 들어가고, 토마토소스엔 간 소고기가 들어가고, 제일 위층엔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뿌린다. 어마 무시하게 두툼한 피자 같달까. 내가 만든 라자냐엔 치즈도, 고기도 안 들었지만 대신 향신료를 넣은 수제 면을 직접 밀어서 넣었고, 토마토소스엔 향긋한 마늘과 양파를 가득 넣어서 뭉근한 불에 오래 우려 주었다. 그러니 오늘 라자냐가 성공한 건, 베샤멜에 들어간 우유 때문이 아니라는 게 명확하다. “이 라자냐는 완전한 비건 음식은 아니에요. 우유를 넣었거든요. 아무도 마시지 않길래 버리는 것보단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전부 넣었어요.” 평소 내가 요리할 땐 절대 동물성 식품을 쓰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가족들이 나를 잠시 멍하니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낭비보다 더한 동물과 환경에 대한 모독은 없지. 잘 활용해서 맛있게 요리해줘서 고마워.” 잠시 뒤 장보기 목록에 우유 대신 두유가 적힌 걸 슬쩍 봤다. 푸근한 밤이다.
‘낭비 제로, 꾸덕푸근 만두피 라자냐’
재료 : (토마토소스) 토마토소스 캔(고기나 치즈가 들어있지 않은 순수 토마토 캔 혹은 생 토마토 3-4개 다진 것), 마늘 3쪽, 양파 한 개
(베샤멜소스) 식용유 세 스푼, 밀가루 세 스푼, 달지 않은 식물성 우유 500ml(두유, 오트밀유, 쌀유, 헤이즐넛유, 아몬드유 등), 후추, (넛맥)
달걀이 들어가지 않은 만두피, 올리브유, 가지 두 개
만두피가 없다면 면부터 만들자. 볼에 밀가루 한 컵 반(종이컵 기준, 혹은 머그컵 하나 가득), 소금 한 꼬집, 원하는 향신료(큐민 추천), 올리브유 한 줄기를 넣고 섞은 다음 뜨끈한 물을 밀가루 양의 1/6 정도 넣어주고 반죽한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른 반죽이다. 계속 반죽하다가 하나로 뭉쳐질 정도가 되면 잠시 휴지 시켜준 후 반죽을 6개로 나눈 다음 밀대나 소주병으로 열심히 밀어준다. 면 하나가 오븐 용기의 반 정도 크기면 적당하다.
가지를 최대한 넓적하게 썰어준다(두께는 1cm 정도가 적당). 소금을 살짝 뿌려준 후, 올리브유를 살짝 넣고 달군 팬에 노릇하게 구워준다(팬이 제대로 달궈지지 않으면 가지가 기름을 너무 많이 흡수한다). 갈색빛이 돌 정도로 양면을 구워준 후 따로 접시에 담는다. 이번엔 같은 팬에 올리브유와 다진 마늘, 다진 양파를 넣고 약한 불에 올린다. 향이 우려 나는 동안 베샤멜소스도 만들자. 중간 크기의 냄비를 꺼내 식용유와 밀가루를 넣고 약한 불에서 볶는다(충분히 볶아주지 않으면 밀가루 향이 강하게 난다). 살살 섞어주면서 동시에 옆 동네 프라이팬에 토마토 캔(혹은 다진 토마토), 소금, 후추를 넣고 끓인다. 이제 토마토소스는 살짝 졸이기만 하면 되니 다시 베샤멜소스에 집중하자. 루가 옅은 갈색을 띠면 식물성 우유를 한꺼번에 부어준다. 곧장 거품기로 계속 저어주면서 소스가 걸쭉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소스가 걸쭉해지면 소금, 후추, 넛맥을 넣어 섞어준 후, 체에 거르거나 핸드믹서(도깨비방망이)로 확 갈아준다(솔직히 이 과정은 생략해도 먹는데 문제는 없다. 난 생략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오븐을 켜서 180도로 예열한다. 졸인 토마토소스를 다른 볼에 옮겨 담고(밀가루 반죽을 한 볼에 그대로 담자), 그 프라이팬 그대로에 물을 가득 넣고 팔팔 끓인다. 오븐 용기에 먼저 토마토소스를 얇게 한 층 깐다(토마토소스엔 기름기가 있어서 바닥에 달라붙지 않아 좋다). 끓는 물에 만두피(혹은 직접 만든 면)를 넣고 2분간 삶은 후 용기에 깔아준다. 다음으론 베샤멜소스를 깔고, 구운 가지를 깔고......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순서는 크게 상관없다. 면은 삶고 나면 달라붙기 쉬우니 층을 깔 때마다 필요한 만큼만 따로 삶는 걸 추천한다). 재료를 모두 넣은 다음 오븐에 넣고 30-40분 굽는다. 샐러드와 함께 서빙한다. 베샤멜소스의 풍부함이 치즈가 없어도 푸근한 맛을 내게 해 준다. 비건 요리에 대해 거리를 느끼는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자랑하듯 내놓기 좋은 파티메뉴다. 참, 다들 엄청 먹을 테니 양은 넉넉하게 준비하는 걸 추천.